▲한국여성노동자회 대학생 자원활동가 마라가 김서현 씨를 인터뷰 하고 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글로벌 커리어우먼을 꿈꿨지만, 현실은 '시궁창'
"저는 성공한 여성이 되고 싶었어요. 하이힐, 정장을 차려 입으면서도 국제기구나 NGO에서 일하는 그런 멋있는 여성상을 바랐던 것 같아요."
서현 씨는 원래 비영리·사회공헌 분야 직업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 졸업이 가까워지고, 부모님의 퇴직시기도 다가오면서 안정적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서현 씨는 취업을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다'고 했다. 취업시장이 불안정 하더라도 주어진 선택지 중 가장 나은 것을 택하기 위해 서현 씨는 토익 점수를 따고,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의 언어도 준비했으며,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과 전산회계 자격증 등을 구비했다. 그는 취업과 연계되는 분야로 유럽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취업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살펴보니 여성들에게 취업의 문제는 연봉과 적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고민하게 되죠. 저희 어머니 같은 경우는 의료 쪽에서 종사하시다가 아이들 때문에 10년 정도 일을 쉬었다가 늦은 나이에 직장으로 돌아가 힘들게 다시 자리 잡으셨거든요. 그리고 대기업에서 일했던 외숙모 같은 경우도 (여자라는 이유로) 어떻게 더 쉽게 퇴직을 당하는 지도 보았고요."
주변을 둘러보아도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아 온 여성을 찾기가 힘들었다. 당장 가족들의 사례만 봐도 막막했다. 서현 씨는 그만큼 한국에서 여성이 경력 단절되지 않고 일을 계속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체감했다. 들려오는 비슷한 세대의 지인들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영업직 쪽은 '물경력'(경력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행태)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쪽으로 입사했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많이들 잘린다고도 하더라고요. 그리고 외국기업에서 서비스업 쪽 일하던 한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한국 동종업계에 면접을 봤는데, 여자 나이 26살은 아슬아슬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어요."
'국내 대기업은 힘든 25살 여자', 회계 쪽으로 취준갖가지 스펙을 마련했지만 취업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서현 씨는 이력서, 자소서 그리고 면접을 대비하기 위한 학원에 다녔다. 대략 한 반에 10명의 취준생들을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달 동안 '취업 스킬' 세미나를 제공하는 학원이었다. 서현 씨는 전직 대기업 이사인 남자 선생님 반에 있었다. 세미나 선생님은 서현 씨에게 대뜸 회계·전산 분야가 잘 맞을 것이라며 서현 씨가 취직할 분야를 회계로 정해주었다고 한다.
"그 분과 면담을 할 때는 저보고 25살 넘은 여자는 국내 대기업은 무리라고 했어요. 이 말 때문에 저는 스스로 한계를 미리 그어버렸고요. 그리고 수업 시간에 가만히 듣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고 회계가 딱 적성에 맞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수업 시간에는 기본적으로 경청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웃음) '조용해 보이는 여자'는 회계 전산직과 같이 누군가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업무에 제격이라고 판단하신 거겠죠."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말을 들은 후 서현 씨는 그 선생님이 말한대로 회계쪽 취준을 결정했다. 무려 대기업 이사로 지냈던 사람이 무 자르듯 이쪽이 맞을 것이라 하니, 다른 분야를 잘 모르는 취준생의 입장에선 그의 말이 나침반과 같았다. 게다가 회계 분야는 여자들이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직장이라는 기대도 결정에 한 몫 했다. 주변으로부터 회계·전산직은 여성들이 대부분이니까 아이를 낳아도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고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경력을 인정받고 계속해서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
그러나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경력단절 없이 근무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좋은 근무환경을 뜻하진 않는다. 들여다보면 박봉과 오랜 근무시간에 시달리는 '안 좋은 일자리'들을 '여 직원들이나'하는 일로 치부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사기업 회계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가 이제 3년차로 접어들었는데, 직급이 올랐지만 정말 박봉이래요. 최저시급보다 조금 더 버는 정도? 그런데 같은 직장의 남자 과장이 '회계 전산직은 여자가 길게 할 수 있을만한 일이다' 말하면서, '(널) 자르진 않을 거야'라고 말했대요. 이런 거 보면 회계 전산직은 같은 동료가 아니라 '여직원'의 영역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성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상대적으로 오래 일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요."
서현 씨는 자신에게 '안정적인 직장'은 무난한 월급, 유연한 노동환경, 그리고 쉽게 잘리지 않는 것의 삼위일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안정성'은 경력 단절을 당하지 않는 것 위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저를 포함한) 여성들이 쉽게 잘리지 않는다는 것만 보고 회계 분야로 취직하길 선택한다고 봐요. 회계뿐만 아니라 비서, 간호 조무사 같은 직종들도. 설사 경력이 단절되더라도 재취업은 빨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서현 씨는 이렇게 경력단절을 기준으로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한 강박이 자신의 존엄성을 점점 침해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나 자신'을 기준 삼아서 미래를 설계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여성에게 제약이 많으니 제가 이 현실에 잠식 당하는 것 같았어요. 아직 오지도 않은 30대와, 하지도 않은 결혼, 낳지도 않은 아이를 걱정하면서 말이에요. 원하는 분야로 취업할 수 없는 게 따지고 보면 내 잘못도 아닌데, 나중에는 스스로를 공격하게 되고... 힘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