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포로국군들에게 벗겨진 채 끌려가는 인민군 포로 (출처: 박도 사진집)
박도 사진집
호죽기 기총소사에 천정이 무너졌어'부웅'하는 정찰기 소리가 들려왔다. 정찰기는 관평리 마을을 낮게 날아다니며 비행했다. 불안감을 느낀 마을 청·장년들이 인근마을인 청천면 송면과 삼송마을로 피신했다. 마을에는 여성과 노약자만 남게 되었다. 잠시 후 미군 폭격기 4대가 관평리 상공에 나타났다. 폭격기는 주저 없이 관평리에 폭탄을 투하했다. 이어서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했다. 즉 비행기에 설치된 기관총으로 마을 가옥에 총질을 해댄 것이다.
1951년 2월 6일에 있었던 이날의 미군 폭격과 기총소사로 상관평에서는 김승범 어머니가 다리에 총을 맞아 평생 장애인으로 살았다. 김호범(당시 20세)은 기총소사로 집 천정이 무너지면서 동시에 총탄을 맞았다. 방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지만 즉사했다. 하관평에서는 이상덕 어머니, 박석범 처, 박흥식 백부가 총에 맞아 죽었다. 관평리에서 졸지에 5명이 죽었다.
폭격 후 피난지에서 돌아 온 최동길(90세. 괴산군 청천면 하관평)은 "호죽기가 와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호죽기란 오스트레일리아 폭격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호죽기'의 연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오스트리아 출신인데, 호주(오스트레일리아)로 착각해, 이 대통령이 처가(妻家)나라에서 빌려 온 전투기인 '호죽기'로 통칭한 것이다.
공림사 주차장엔 마을이 있었다이날의 폭격은 관평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청천면 상신리와 사담리에도 이루어졌다. 미군폭격이 있었던 21일 후인 1951년 2월 27일에는 880부대(화랑부대)가 관평리에 진주했다. 880부대는 주민들이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밥을 해주고 도와줬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청천면 관평리·사담리·상신리는 북한군과 빨치산들의 이동루트에 인접한 마을이었다. 그런 연유로 미군 폭격이 있었던 2월 초와 880부대가 진입한 날 직전에 북한군인들이 마을에 나타나 밥을 해먹었다. 심지어 중대본부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군인들은 이 마을에 북한군이 있는지 확인하고, 북한군에 협조한 주민들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군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관평리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횃불을 들고 초가집 처마에 불을 당겼다. 집 안에 주민들이 있으면 총부리를 들이대고, 밖으로 나올 것을 강요하며 불을 질렀다. 가재도구나 식량을 꺼낼 시간은 전무했다. 무조건 가옥에 불부터 질렀기 때문이다.
880부대원들이 관평리에 불 지르던 날 최동길 부친 최춘락은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당시 급속하게 번진 장티푸스에 걸렸기 때문이다. 장티푸스는 일종의 열병으로 몸을 따뜻하게 해야만 호전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집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다짜고짜 최춘락을 끌어냈다. 사정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군인들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가족들이 이불을 꺼내 와 최춘락을 감쌌다. 집은 이내 불타 버렸고 추운 늦겨울에 최춘락은 고열에 시달리며 벌벌 떨었다. 결국 최동준은 그날 저녁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봐야만 했다.
군인들은 1951년 2월 27일 관평리·사담리·상신리·공림리에 불을 질러 200여 가호를 태웠다. 관평리 2가구와 상신리 한 가구를 제외한 모든 주택이 전소되었다.
낙영산 초입에는 공림사라는 절이 있다. 현재 공림사 입구에 대형차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에는 원래 공림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10가구가 전소되면서 마을이 아예 없어졌다. 이후에도 집을 잃은 공림리 주민들이 재건축 엄두를 못내 결국 마을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