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장 물고문'이 군인에게는 장난이었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던 청천면 사람들의 한국전쟁

등록 2018.03.09 15:22수정 2018.03.1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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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막 보 관평리 청년들이 물고문을 당했던 보
홍주막 보관평리 청년들이 물고문을 당했던 보박만순

"야! 너 이리 와"

홍주막 마을 입구에 들어 선 군인들은 움막에 있던 최동습(당시 30대)을 불렀다. 최동습은 어리둥절해 하며 멈칫거렸다. 그러자 군인들의 입에서는 바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이 ××야 이리 오라고"하며 총구를 들이댔다.

최동습은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길가로 나오니 하관평 청년 5명이 옷을 홀딱 벗은 채로 서 있었다. 군인이 그에게 전부 벗을 것을 지시했다. 다른 청년들 모두가 옷을 벗고 있었기 때문에 똑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3월 초이기는 하지만 꽃샘추위가 있었고 청천면 산골짝의 바람은 매서웠다. 전부 벗겨진 청년들은 혁대로 옷을 감아 머리에 인 상태였다. 혁대로 머리와 턱을 이어 마치 군인이 철모를 쓴 듯했다.

피부는 소름이 돌고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길거리로 나와 몇 십 미터를 걷자 홍주막에 있는 보(洑)에 다다랐다. 보(洑)는 하천에서 관개용수를 수로에 끌어들이려고 둑을 쌓아 만든 저수시설로 깊이가 성인 남성의 허리에서 머리까지였다. 군인들이 청년들에게 "전부 물에 들어간다. 실시!"라고 외쳤지만, 청년들은 주저했다. 3월 초라고는 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서리가 내리고 새벽에는 살얼음이 어는 산촌(山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군인들이 "탕"하며 공포탄을 쏘았다.

혼비백산한 청년들은 물에 첨벙첨벙 뛰어들었다. 이른 아침 보에 뛰어든 청년들의 얼굴은 하얗게 변하며 이가 딱딱 거리고 살이 덜덜 떨렸다. 보 주변에 있던 군인 3~4명은 실실 웃고 있었다. 군인상급자가 "자 지금부터 즐거운 물놀이를 한다! 서로 마주보고 물을 끼얹어!" 하는 것이 아닌가. 청년들이 다시 멈칫거리자 이번에는 군인들이 물을 향해 총을 쏘았다. 보에 물보라가 튀자 놀란 청년들이 허겁지겁 물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멈추자 청년들 머리가 하나 둘 드러났다.

"다시 명령한다. 서로에게 물을 끼얹어!" 하자 겁에 질린 청년들은 물을 힘껏 상대편에 끼얹었다. 때 이른 물장구 놀이(?)였다. 약 30분 동안 물을 끼얹은 청년들은 입술이 파래지고 근육 전체가 마비되며 기진맥진했다. 그제서야 군인이 "모두 나와" 하며 상관평 방향으로 끌고 갔다.

당시 청년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조무래기들이 "빨갱이들이라 (피부가) 빨간가 보다"하며 깔깔거렸다. 하관평에 살았던 강필중(당시 13세)은 "그때 마을 형님들이 군인들에게 고문을 당한 것인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철없게 웃고 있었으니..."하며 후회했다. 군인들에 의한 물고문은 1951년 3월 초 충북 괴산군 청천면 관평리 경계에 있던 경북 문경군 가은면 완장리 홍주막에서 있었다.


인민군 포로 국군들에게 벗겨진 채 끌려가는 인민군 포로 (출처: 박도 사진집)
인민군 포로국군들에게 벗겨진 채 끌려가는 인민군 포로 (출처: 박도 사진집)박도 사진집

호죽기 기총소사에 천정이 무너졌어

'부웅'하는 정찰기 소리가 들려왔다. 정찰기는 관평리 마을을 낮게 날아다니며 비행했다. 불안감을 느낀 마을 청·장년들이 인근마을인 청천면 송면과 삼송마을로 피신했다. 마을에는 여성과 노약자만 남게 되었다. 잠시 후 미군 폭격기 4대가 관평리 상공에 나타났다. 폭격기는 주저 없이 관평리에 폭탄을 투하했다. 이어서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했다. 즉 비행기에 설치된 기관총으로 마을 가옥에 총질을 해댄 것이다.


1951년 2월 6일에 있었던 이날의 미군 폭격과 기총소사로 상관평에서는 김승범 어머니가 다리에 총을 맞아 평생 장애인으로 살았다. 김호범(당시 20세)은 기총소사로 집 천정이 무너지면서 동시에 총탄을 맞았다. 방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지만 즉사했다. 하관평에서는 이상덕 어머니, 박석범 처, 박흥식 백부가 총에 맞아 죽었다. 관평리에서 졸지에 5명이 죽었다.

폭격 후 피난지에서 돌아 온 최동길(90세. 괴산군 청천면 하관평)은 "호죽기가 와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호죽기란 오스트레일리아 폭격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호죽기'의 연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오스트리아 출신인데, 호주(오스트레일리아)로 착각해, 이 대통령이 처가(妻家)나라에서 빌려 온 전투기인 '호죽기'로 통칭한 것이다.

공림사 주차장엔 마을이 있었다

이날의 폭격은 관평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청천면 상신리와 사담리에도 이루어졌다. 미군폭격이 있었던 21일 후인 1951년 2월 27일에는 880부대(화랑부대)가 관평리에 진주했다. 880부대는 주민들이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밥을 해주고 도와줬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청천면 관평리·사담리·상신리는 북한군과 빨치산들의 이동루트에 인접한 마을이었다. 그런 연유로 미군 폭격이 있었던 2월 초와 880부대가 진입한 날 직전에 북한군인들이 마을에 나타나 밥을 해먹었다. 심지어 중대본부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군인들은 이 마을에 북한군이 있는지 확인하고, 북한군에 협조한 주민들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군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관평리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횃불을 들고 초가집 처마에 불을 당겼다. 집 안에 주민들이 있으면 총부리를 들이대고, 밖으로 나올 것을 강요하며 불을 질렀다. 가재도구나 식량을 꺼낼 시간은 전무했다. 무조건 가옥에 불부터 질렀기 때문이다.

880부대원들이 관평리에 불 지르던 날 최동길 부친 최춘락은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당시 급속하게 번진 장티푸스에 걸렸기 때문이다. 장티푸스는 일종의 열병으로 몸을 따뜻하게 해야만 호전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집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다짜고짜 최춘락을 끌어냈다. 사정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군인들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가족들이 이불을 꺼내 와 최춘락을 감쌌다. 집은 이내 불타 버렸고 추운 늦겨울에 최춘락은 고열에 시달리며 벌벌 떨었다. 결국 최동준은 그날 저녁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봐야만 했다.

군인들은 1951년 2월 27일 관평리·사담리·상신리·공림리에 불을 질러 200여 가호를 태웠다. 관평리 2가구와 상신리 한 가구를 제외한 모든 주택이 전소되었다.

낙영산 초입에는 공림사라는 절이 있다. 현재 공림사 입구에 대형차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에는 원래 공림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10가구가 전소되면서 마을이 아예 없어졌다. 이후에도 집을 잃은 공림리 주민들이 재건축 엄두를 못내 결국 마을이 없어졌다.

송덕비 심재면 청천면장 송덕비
송덕비심재면 청천면장 송덕비박만순

청천면장 송덕비 사연

하지만 사담리와 상신리 상황은 달랐다. 똑같이 불은 났지만 당시 심재면 면장이 주민들의 억울한 사연을 알고 지원을 해주었다. 두 마을 주민들이 산에서 마음대로 벌목을 하게끔 해, 움막과 집을 새로 짓게 도와주고, 한 가구당 안남미 5말씩을 지원해 주었다. 이 일로 인해 마을 주민들은 1953년도에 '심재면송덕비'를 세웠다. 이 송덕비는 현재까지 보존 되어 심재면의 선행을 알 수 있다.

"부대원 중에 보도연맹원을 단 한 명도 내줄 수 없소"

1951년 겨울 난리에 홍역을 치룬 청천면 지역은 불행 중 다행으로 1950년 여름 난리에는 피해가 전무했다. 그 이유는 순전히 청천면 대한청년장과 청년방위대장을 역임한 정영근(1909년생. 1954년 작고)씨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청천지서장이 정영근 청년방위대 중대장을 찾아왔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상부의 명령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할 수밖에 없으니, "청천면 청년방위대원중 보도연맹에 가입한 대원들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영근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조국에 충성하기 위하여 공비들과 싸우고 있다. 지금은 다 충성스러운 국민일 뿐이다. 부대원들 중에 보도연맹원들을 단 한 명도 내 줄 수 없다"고 버텼다(괴산향토사연구회, 『괴산군 향토방위군의 발자취』, 2007)

당시 정영근 중대장의 위세는 지서장보다 높았다. 대동청년단과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책임자를 맡으면서 청천면에서는 가장 힘 있는 지역유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정영근의 노력과 영향으로 괴산군 청천면에서는 보도연맹사건 피해자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느티나무는 알고 있나?

관평리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존재로, 어른 7명이 한아름을 해야 나무를 에워 쌀 수 있을 정도의 두께였다. 그런데 미군 폭격으로 이 나무가 불타 버렸고, 현재는 전쟁 직후 새로 심은 느티나무가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새로 심은 느티나무가 전쟁의 아픔을 알 리 없지만, 주민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폭격과 총격에 죽은 사람들의 아픔도 크지만, 당시 미군의 폭격과 국군의 방화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살아 온 세월의 무게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이들의 상처를 누가 어루만져줄까?

피해지도 청천면 피해지도
피해지도청천면 피해지도박만순

#미군 폭격 #880부대 방화 #물고문 #심재면 송덕비 #정영근 중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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