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조선의 세계지도, 우리가 몰랐던 숨은 공신

[지도와 인간사] 일본에서 만난 강리도,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독립'

등록 2018.06.15 10:38수정 2018.06.1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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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 월인천강지도
강리도월인천강지도김선흥

지난 호에서 예고한 내용은 뒤로 미루고 최근 교토 여행에서 알게 된 사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조선 초의 세계지도 강리도가 보존된 곳은 교토 류코쿠대학의 오미야(大宮) 도서관입니다. 류코쿠대학의 다른 캠퍼스에는 또 후카쿠사(深草)도서관이 있더군요. 나그네(필자)는 지난 5월 29일 두 도서관을 탐방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후카쿠사 도서관에 안중근 의사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눈에 익은 안중근 의사의 혈심 어린 '獨立(독립)'이라는 글씨 실물도 후카쿠사 도서관에 있더군요. 이렇게 류코쿠대학의 두 도서관에는 우리 조상이 남긴 진귀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안중근 의사의 유물을 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학의 이수임 교수(안중근 동양평화 연구 센터 대표), 전남대 김정례 교수가 소개해 주신 시게모토(重本)박사(전 류코쿠대학 교수)의 도움으로 가능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글씨만큼은 한국에 귀환시키는 것이 오랜 염원이라는 이수임 교수의 토로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수임 교수의 말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 유물의 소유주는 따로 있고 류코쿠대학은 그걸 위탁받아 관리, 보존, 활용하고 있는 중이라 합니다. 현재 소유자 측에서 한국 반환을 반대하고 있다는군요.

안중근 의사 유물 가운데 여성: 이수임(李洙任) 교수, 오른쪽: 필자
안중근 의사 유물가운데 여성: 이수임(李洙任) 교수, 오른쪽: 필자김선흥

아울러 나그네는 시게모토(重本) 교수의 안내로 류코쿠대학 오미야 도서관을 방문, 귀중문서 열람실에서 오키(大木) 사서(강리도 책임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자료를 제공받았습니다.

류코쿠 대학 오미야 도서관  이 도서관 지하에 강리도 소장
류코쿠 대학 오미야 도서관 이 도서관 지하에 강리도 소장김선흥

오미야 도서관에서 발간한 소책자 <도서관의 지보至寶>(2013)에는 국가 지정 보물인 '유취 고집(類聚古集)'을 비롯한 10개의 진귀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표지는 역시 강리도가 장식하고 있습니다(아래 사진).


류코쿠 대학 오미야 도서관 지보 표지에 강리도 수록
류코쿠 대학 오미야 도서관 지보표지에 강리도 수록김선흥

강리도에 대한 소개 글에 이런 구절이 보입니다.

"현존하는 세계 最古의 세계지도 중의 하나이다…. 지도에 기록된 지명의 대부분은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제국시대의 것이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앞서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세계지도로서 학술적 연구 가치가 높다."



한편, 나그네는 이번 교토 방문을 통해 그동안 품어 왔던 의문 하나를 풀게 되었습니다. 과연 강리도 류코쿠본의 실제 모습이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서울대 이찬 교수가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그 사진판을 구했고 그걸로 모사본을 제작하여 규장각에 기증했다는데, 사진판을 얻게 된 경위는 무엇인가? 북한은 과연 이 지도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그들은 강리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혹시 북한에 강리도의 원본이나 사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옛 <교토신문> 기사가 풀어주었습니다. 기사는 두 건입니다. 하나는 1981년 2월 15일자 신문에 실린 '이조시대의 세계지도, 400년만에 귀향하다'라는 기사입니다. 다른 하나의 기사는 다음 해의 것(일자 불명)으로 북한과 관련된 내용입니다(교토의 재일교포 송기태 선생 제공).

교토 신문 1981년 2월 15일자
교토 신문1981년 2월 15일자김선흥

두 기사의 요지를 종합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980년 3월 교토의 재일교포 2세, 3세(조총련 포함) 및 일본인 등 열 명이 한반도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동아리 코리아 연구회(대표 김성덕, 당시 36세)를 만들었다. 이들은 매월 한 차례 정기모임을 통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교토 류코쿠대학에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세계지도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더욱이 이 지도는 세계지도의 역사에 있어서 가치가 매우 높은 지도였다. 반드시 이를 한국에 귀환시켜야 한다고 결심한 이들은 행동에 나선다.

김대표와 일본인 사무국장 쓰지 씨(고교 교사, 당시 32)가 중심이 되어 류코쿠대학을 접촉하여 협조를 구했다. 대학 측은 "이 자료를 해외에 유출한 사례가 없다. 하지만 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사진판은 제공할 용의는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결과 대학 도서관측에서 강리도 패널 사진(79 x 60 cm) 을 작성하여 코리아 연구회에 전달해 준다. 15년 전에 도서관에서 촬영해 두었던 네거티브 필름을 활용하여 만든 것이었다.

코리아 연구회는 1981년 2월 15일 교토에서 서울대 이찬 교수(지리학회 회장)에게 패널 사진을 전달하고 같은 해 6월에 북한의 중앙박물관(평양 소재)에 보내게 된다. 이를 받아 본 북한 측은 다음 해에 류코쿠대학에 대한 감사편지와 함께 니켈 등 광물 표본 30개를 교토의 코리아 연구회로 보내왔다.

이를 김성덕 대표가 류코쿠대학 마스나가 도서관장에게 전했다(아래 기사 사진). 김성덕 대표는 "재일한국, 북한인 2, 3세와 일본인이 공동협조로 사진판으로나마 강리도의 귀향이 실현되어 기쁘다. 앞으로 반드시 모사도(模寫圖)를 재일동포와 일본인의 협력으로 제작하여 우호친선 관계를 더욱 진전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원본과 동일한 모사도를 제작하겠다는 의욕을 불태우면서 이들은 전문가에게 제작 비용을 상담하였다. 무려 약 1천만 엔의 비용이 소요될 거라는 말을 듣고…

교토 신문 북한에서 보내온 답례품
교토 신문북한에서 보내온 답례품김선흥

이상이 37년 전의 <교토신문>이 전하는 스토리입니다. 하지만 이 기사가 전하는 구체적인 이야기는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제대로  소개된 바 없습니다. 한편,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신병주 저, 2007년)이라는 책자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 이찬 교수(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1973년 일본 교토의 류코쿠대학 도서관에서 '혼일강리도'(강리도) 필사본을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중략) 이찬 교수는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서 류코쿠대학 측이 보관하고 있는 사진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중략) 1983년 마침내 필사본 지도가 완성되었다. 이찬 교수가 처음 일본에서 지도를 보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지 15년 만의 일이었다. 현대 지도학자의 오랜 집념과 노력 덕분에 규장각은 '혼일강리도'라는 걸작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143쪽)


분명 감동적인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교토의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연대하여 대학 당국의 협조를 얻어 냈던 스토리와 그로 인해 우리가 강리도 사진판을 입수할 수 있었던 사실은 빠져 있습니다.

<교토신문>이 말해 주듯이 강리도 부활의 서사시에서 코리아 연구회의 안목과 열정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그분들이 한국뿐 아니라 북한에도 같은 사진판을 보낸 사실도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국적과 체제를 넘어 강리도의 귀환을 위해 마음과 힘을 합쳤던 선구자들의 깊은 뜻을 이렇게나마 기록해 두고자 합니다.

강리도는 어떤 경계도 장벽도 없는 광대한 세상의 초상화이자 그것을 향한  염원입니다. 혼융하여 하나를 만든다는 뜻인 '혼일'이 지도 이름의 첫머리에 놓인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한 강리도가 안중근 의사의 글씨와 함께 일본 땅의 같은 공간에 놓여 있다는 것이 기묘하기만 합니다.

동양 평화의 한이 서린 안중근 의사의 '독립'이 아직도 일본 땅에 유폐되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바야흐로 한반도가 평화와 통일을 향해 용트림을 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안중근 의사의 '독립' 글씨가 한국의 품으로 돌아오고, 강리도의 꿈, 경계 없는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면서 교토 탐방을 마칩니다.
#강리도 #교토 류코쿠 대학 #안중근 #코리아 연구회 #서울대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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