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2년 12월 27일 중앙청에서 열린 유신헌법 공포식
연합뉴스
'10월 유신'은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로서, 박정희는 이미 10ㆍ27 보위법 파동과 7ㆍ4남북공동성명 등 내외적인 여건을 조성한 다음 야당의 분열을 계기삼아 또 다시 헌정을 유린한 것이다.
당시 신민당은 양분상태에서 치열한 당권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71년의 진산파동으로 신민당의 당권을 장악한 김홍일은 72년의 전당대회를 맞아 유진산의 롤백작전에 직면하자 김대중계의 지원을 받아 유진산 사단과 대결을 시도하다가 정면충돌을 빚어 신민당은 마침내 분당사태를 맞게 되었다.
유진산 사단과 김홍일 사단으로 갈라진 신민당의 전당대회는 72년 9월 26일과 27일 각각 시민회관과 효창동 김홍일 자택에서 별도의 대회를 열어 분당사태를 빚고 만 것이다.
시민회관대회에는 유진산ㆍ고흥문ㆍ김영삼ㆍ이철승ㆍ정해영ㆍ신도환 등 이른바 진산사단의 범주류가 참석하여 합법성을 주장하고, 효창동대회에서는 김홍일ㆍ김대중ㆍ양일동계가 참석하여 시민회관대회의 무효를 선언했다.
두 대회가 개최된 후 김홍일측이 유진산을 상대로 당대표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여 법통시비가 일어난 가운데, 국회는 8ㆍ3재정조치 이후 문제가 된 '동결사채'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국정감사의 활동을 벌이다가 10월 유신으로 국회해산과 정치활동의 중지라는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박정희는 이같은 야당의 분열상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거에 단독출마,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신체제를 가동시켰다. 박정희가 무력을 동원한 비상수단으로 체제개편을 단행하게 된 것은 3선개헌에 이어 또 다시 개헌을 단행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 밖으로 고전한 데다 야당에 의한 국회의 비판기능의 활성화로 인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재집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쿠데타를 감행하기 전에 두 차례나 북한측에 '사전통보'한 것으로 후일 드러났다. 주한 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72년 10월 31일자 비밀문건(2급 - Secret)에 따르면,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은 10월 12일 박성철 북한 부수상을 만나서 "남북 대화를 지속적이고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정치시스템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고 우리 정부는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비밀문건은 또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실무대표인 정홍진이 계엄선포 하루 전인 10월 16일 북쪽 실무대표인 김덕현을 판문점에서 만나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통보했다"고 적었다.
지난 2009년에 공개된 동독과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북한 관련 외교문서에는 이후락이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대표인 김영주에게 "박대통령은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10월 16일) 이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적혀있다.
우연인지 '짜고 친 고스톱' 인지, 박정희의 유신헌법과 김일성을 유일체제로 하는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이 72년 12월 27일 같은 날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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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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