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레 군항 공습일본 해군의 잔존 함대와 기반 시설들이 완파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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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의 제국 일본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6월 말 미군에게 함락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의 운명을 예고한 것과도 같았다. 7월 26일에는 연합국 국가들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이 있었다.
그 무렵인 7월 24일과 28일에 미군이 실시한 '구레 군항 공습'은, 잔존해 있던 일본 해군의 수상함대와 기반 시설들을 철저히 파괴했다. 당시의 육군대신이었던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대장은 궤멸 상태에 놓인 해군을 가리켜 '팔다리뿐 아니라 불알까지 잘렸다(海軍は手足どころか、金玉も取られている)'고 평가하며, 해군이 사실상 독자적인 운영 능력을 상실했다고 단언했다.
물론 육군이라고 상황이 낙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참패도 문제였지만, 전선으로의 보급이 사실상 마비된 상황이 더욱 근본적인 문제였다. 뉴기니와 필리핀, 버마 등 동남아시아 지역과 중국 대륙에 고립된 지상군 병력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본토로부터 보급받는 것을 포기하고 적과의 교전이 아닌 '자활'(自活)에 매진하고 있었다.
즉, 전황 타개를 위한 작전을 전개하는 것은 고사하고 장병 개개인의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구하는 것마저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사 연구가 야마자키 마사히로(山崎雅弘) 작가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 전몰자의 6할의 사인이 '아사'였다. 그러니, 당시 보급 문제의 심각성은 더 부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1945년 7월의 제국 일본은 이미 정상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평가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국체의 보전, 즉 천황제 유지를 위해서는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가 돼 있었던 제국 일본의 지도부는 '본토결전' '일억옥쇄' 기치를 내걸고서 '전쟁 완수'를 부르짖었다. 다시 말해, 연합군을 상대로 일본 본토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여 설사 전 국민이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항복하지 않겠노라 천명한 것이다(관련기사:
"주민 넷 중 하나가 죽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국민들).
이에 따라 일본 각 지역에서는 본토결전 수행을 위한 '결호 작전'의 준비가 이뤄졌다. 이때 제주도 역시 결호 작전의 일부인 '결7호 작전'에 포함돼 요새화 작업이 실시됐다.
본토결전의 준비는 이미 상식적인 판단에서 한참 벗어난, 아집과 광기에 가까웠다. 이미 일본의 항공기 보유량은 바닥을 치고 있었으므로 항공기를 이용해 적 함대에 자폭한다는 이른바 '가미카제' 특공마저 여의치 않게 된 상황. 대본영은 인간어뢰 카이텐, 자폭보트 신요 등을 '결전 병기'로 내세우며 가미카제의 공백을 메우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