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이 경찰에게 생매장 당할 뻔했던 장소
박만순
1949년 8월초 충북 영동군 영동읍 심원리. 원두막에서 참외를 먹던 소년 김영환(당시 16세)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마을 어귀에 새까만 개미 떼같은 것이 몰려드는 게 아닌가. '저게 뭘까?'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그것들은 김영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검은 제복을 입은 영동경찰서 경찰이었다. 그 중 지휘자로 보이는 이가 "야, 내려와!"하며 김영환을 끌어내렸다.
그 경찰은 영환에게 질문을 했는데, 답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영환이 대답을 못하자 경찰들은 그를 천지봉 초입으로 끌고 갔다. "빨리 걸어 이 자식아" "..." 김영환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얘졌는데 뒤따라오는 경찰들이 '앞에 총'을 하고 사격 자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구덩이를 깊게 파라고 지시했다. 경찰 두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구덩이를 파는 동안 영환의 마음은 오그라들었다. '내가 저기서 죽는 걸까'라고 생각하니 오금이 저려 왔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가 만들어지자 지휘관은 김영환에게 "빨갱이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사실대로 말해!"라며 윽박질렀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유..." "이놈의 새끼가!" 경찰은 영환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댔고 영문도 모르는 소년은 사지를 떨었다.
"엎드려 뻗쳐." 영환이 엉거주춤 엎드리자 경찰관은 장작으로 엉덩이를 내리쳤다. "하나, 둘, 셋!" 엉덩이 세 대를 맞은 영환은 개구치처럼 뻗어버렸다. "야, 이 자식 구덩이에 쳐넣어." 구덩이에 던져진 김영환은 눈물 반 콧물 반이 됐다. "자,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 이번에도 말하지 않으면 흙으로 덮어 버리겠다." 산채로 매장 시키겠다니... 영환이 지휘관을 쳐다보는데 "탕" 소리가 났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소년은 오줌을 지리고 정신을 잃었다. "영환아!" 잠시 후 가족들이 울며불며 달려왔고 몇 차례 외침 후에 소년은 깨어날 수 있었다. 다행히 경찰은 실탄이 아니라 공포탄을 쏘았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지만 남한 내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펼쳐졌다. 해방 정국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남로당(남조선노동당) 등 좌익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부와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됐다. 이후 경찰과 우익들의 무장 테러 등으로 좌익세력은 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충북 영동군 경찰도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이 와중에 빨치산이 활동하는 산악지대 인근 마을 주민들은 '빨치산 협조자'로 몰고가 합법적인 절차 없이 학살했다. 소년 김영환도 하마터면 황천길을 밟을 뻔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마을 사람 모두 잡혀 와
1949년 그해 여름 영동군 경찰들은 영동읍 심원리에 상주했다. 영동경찰서 경찰이 총동원됐고 심지어 황간에서도 지원나왔다. 심원리 마을 뒷산 천지봉에 빨치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여 명에 달하던 경찰들은 빨치산을 소탕하는 한편 동조자를 찾는다며 주민들을 수시로 괴롭혔다. 어느 날 경찰들이 심원리 주민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했다. 경찰 지휘관은 의자에 앉아 망원경으로 천지봉을 살피며 수시로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빨치산 동조 세력으로 보이는 주민들을 학교 뒤편으로 끌고 가 매타작을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심원리 주민 중 구타와 고문을 당하지 않은 이는 경찰과 친인척이었던 K씨 2가구에 불과했다. 학교 뒤편에서는 비명이 난무했다. 경찰들은 장작으로 주민들을 매타작하고,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을 해댔다. 매타작과 물고문 후에도 걸을 수 있는 이들은 영동경찰서로 걸어가 유치장에 구금됐다. 나머지 주민들도 다음날 영동경찰서로 연행됐다.
당시 주민 몇 명은 '맛보기'로 고문을 당했는데 다름 아닌 소년 김영환이 당한 '산매장' 위협이었다. 심원리 여성 조씨도 같은 고문을 당했다. 좌파 활동가 김동근이 조씨 집으로 들어갔다는 첩보를 접한 경찰들은 조씨 집을 에워쌌다. "여기에 김동근이 숨어 들었지?" "지는 몰라유." "이 ×이 거짓말을 하네." 조씨를 집에서 끌어낸 경찰은 김영환에게 한 것처럼 산매장 위협을 가하고 공포도 쏘았다.
천지봉 골짜기에서 죽은 빨치산 대장 남창우
심원리 사람들의 고통은 빨치산 대장 남창우의 죽음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남창우는 영동군 빨치산 총대장 남덕우의 친형으로 남로당 영동군당 인민유격대가 와해된 후 1949년 봄에 만들어진 인민유격대(01/02부대)의 01부대장이었다. 인민유격대 01부대는 전투부대이고, 02부대(부대장 박노혁)는 지원부대였다. 01부대는 영동군 내의 거의 모든 읍면에 구성됐고, 입산과 지역 활동을 병행했다.(공주대학교 참여문화연구소, 『충북 영동군 2008년 피해자현황조사 보고서)
남창우는 1948년 2월 25일 매곡지서 습격 사건 이후 영동읍 봉현리 아지트에 은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총상을 입었다. 봉현리에서 발견된 남창우는 부상 당한 채 심원리 천지봉 계곡으로 옮겨졌다.
총상을 입은 남창우의 바지는 온통 피로 얼룩졌다. 총에 맞은 그를 지게에 진 이는 영동읍 심원리 대금동에 살던 정씨였다. 총상을 입은 이를 지게에 지고 가는 정씨는 죽을 맛이었지만 뒤따라오는 경찰의 총구 때문에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천지봉 골짜기 입구에서 대열은 멈추어 섰고 지휘관의 턱짓에 경찰 총구에 불이 뿜었다. 영동군 상촌면 돈대리 출신의 남창우가 죽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촌면의 여성 한 명이 죽임을 당했다. 경북 상주군 모서면 사람인 손순애도 이웃한 계곡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심원리 전상철(1936년생) 윗방에서 숨어 있다 잡힌 사람들이었다.
이어서 심원리 박근섭(당시 18세)과 봉현리 서칠용도 빨치산 동조자라는 이유로 천지봉 계곡에서 저세상으로 갔다. "서칠용은 내 초등학교 동창이었는데요. 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 학교를 작파했지요. 어쩌다가 빨치산 심부름 한 죄로 엄하게 죽었지요"라고 전상철은 증언한다. 학교를 같이 다니긴 했지만 서칠용은 또래보다 네 살이 더 많았다.
영동 경찰은 당시 천지봉에 있던 빨치산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남창우 등 민간인 5명을 이곳으로 데려와 죽인 것이다. 이들이 학살된 1949년 6월을 시작으로 8월까지 여름 내내 심원리 사람들은 경찰에 시달려야 했다.
이듬해인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심원리는 그야말로 초상집이 되었다. 오명순, 오영근, 오영기, 노세창 등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됐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윤복만, 정창수는 인민군에 의해 풀려나 고향에 거의 도착해 경찰에 학살되었다. 또 의용군에 끌려간 후 소식이 없거나 살기 위해 월북한 이들도 있었다.
심원리가 '영동군의 모스크바'가 된 이유
심원리에는 오중순(1909년생)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오중순은 일제강점기부터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을 한, 영동읍의 대표적인 혁명가였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조선농민총연맹·조선공산당·민주주의민족전선 영동군지부 선전부장을 맡았다. 당시는 조선공산당이 합법이었다.
이외에도 남로당 영동군당 부위원장을 맡은 김동설을 포함한 다수의 좌파 활동가가 심원리 출신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빨치산 활동에도 참여했고, 주민들도 이들 활동에 협조적이었다. 마을 사람 스스로 심원리를 '영동군의 모스크바'라고 말할 정도로 심원리는 좌익세가 셌다. 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