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는 통일신라시대 왕들의 온갖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상상력으로 그린 신라의 왕.
삽화 이건욱
간략하게만 봐도 자그마치 250여 년의 세월, 10명이 넘는 왕이 고문헌 속에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역사를 볼 때 동궁과 월지는 통일신라의 번성과 쇠락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을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만들었고, 이후 많은 왕들에 의해 낡고 허물어진 건물을 고쳤던 때를 거쳐 새롭게 등장한 왕국 고려에 의해 국운이 기울던 시기까지 신라의 역사와 함께 한 게 바로 동궁과 월지다.
통일신라 왕들의 환희와 고통 지켜봤을 공간
통일신라를 완성한 문무왕은 무열왕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유신 등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한 그는 당나라 세력까지 축출한 탁월한 전략가인 동시에 동궁과 월지의 건설을 명령한 통치자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월지와 동궁의 역사는 이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부침(浮沈)을 거듭한다.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효소왕은 원선, 당원과 같은 나이 많은 대신들의 도움으로 안정적인 국정을 유지했고, 할아버지가 만든 월지의 근사한 건물에서 신하들에게 화려한 잔치를 열어줄 수 있었다.
소성왕은 800년 음력 6월에 왕위에 오른 지 2년도 되지 않아 사망한다. 그가 죽던 해에는 전과 달리 잦은 기상 이변이 있었고, 그로 인해 월지와 동궁의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
소성왕의 맏아들이었던 애장왕이 이를 중수한 것은 동궁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아버지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을 것 같다.
7세기에 만들어진 동궁과 월지는 9세기에 이르러서도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등에 의해 보다 아름답게 다시 만들어졌고, 여기서는 왕과 귀족, 외국 사신들의 크고 작은 연회가 펼쳐졌다.
신라의 제49대 왕인 헌강왕은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한 번 본 글귀는 모두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명석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왕이 된 후에도 문화와 예술에 기반한 정치를 펼친 그는 신명도 남달랐던 듯하다.
최고 권력자가 월지의 근사한 풍경을 보며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헌강왕의 기질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일부 사학자들은 그를 두고 "사회적 안정과 풍요로움을 누렸으나, 중앙 귀족들과 함께 향락적 문화를 즐기는 데만 몰두하고 신라 하대 사회의 불안정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적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동궁과 월지에 관련된 <삼국사기>의 언급 중 가장 비극적인 건 경순왕 때의 기록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927년부터 935년까지 왕위에 있었던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바친 왕'이라는 불명예스런 사실은 경순왕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인색하게 만들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56대 992년간 지속됐던 고대왕국 신라는 사라졌다.
만약 동궁과 월지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다면 경순왕이 고려 태조를 비롯한 다른 나라 병사들을 신라의 선대왕들이 아꼈던 공간에 초청해 굴욕적으로 접대하던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을까.
빛과 어둠, 햇살과 그림자가 공존했던 신라의 역사. 동궁과 월지의 역사 역시 장구하고 드라마틱했던 신라사(新羅史)의 주요한 한 부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