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경주를 떠올리게 할 동궁과 월지의 저물녘 풍경.
경주시 제공
경주는 산책하기 좋은 도시다. 이 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올해도 여행자들의 발을 묶고 있는 상황이지만, 경주에는 여전히 '도시 산책자'가 적지 않게 보인다.
동궁과 월지를 취재하며 모두 6차례 경주를 찾았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대릉원과 첨성대를 거쳐 월지에 이르기도 했고, 어떤 때는 황리단길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복원된 동궁 건물지 앞으로 가기도 했다.
돌담길 건너편에 청아한 자태로 피어있는 새하얀 연꽃과 만나고, 국립경주박물관 내 월지관을 돌아본 날의 경험도 기억에 남았다.
걸음을 빨리 하면 30~40분,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남짓이면 터미널을 출발해 동궁과 월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걷는 여행'의 즐거움을 선물해준 경주.
그러던 어느 날이다. 60대로 보이는 동창생 서너 명이 동궁과 월지 입구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었다.
"야, 격세지감이네. 여기가 이렇게 변했어?"
"세월이 많이 흘렀잖아. 우리가 수학여행 온 게 40년은 됐으니까."
"맞아. 그때는 여길 안압지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안압지... 안하지... 동궁과 월지
소년시절을 추억하는 그들의 기억은 정확했다. 발굴과 복원작업을 거쳐 동궁과 월지로 불리기 전 연못의 이름은 안압지(雁鴨池)였다. 안압지 발굴조사 당시의 에피소드와 성과를 담은 책 <못 속에서 찾은 신라>엔 그와 관련한 설명이 담겼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안압지는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 등 조선시대의 문헌에서 처음 나타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기 전 김시습(1435-1493)이 지은 시에 안하지(安夏池)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안압지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표현이 15세기 무렵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00여 년 전까지는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다니는 연못이라고 해서 안압지, 혹은 유사한 발음의 안하지로 불리던 이 연못이 동궁과 월지로 개칭된 것은 언제였을까. 위의 책은 이렇게 부연한다.
"안압지에서는 1975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의봉4년 개토(679)'명 기와와 '조로2년(680)'명 전돌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을 통해 안압지 주변 건물지가 문무왕 19년(679)에 지은 동궁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안압지라는 명칭은 1982년 당시 국립경주박물관 관장 한병삼에 의해 '안압지는 월지다'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그 명칭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안압지에서 나온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 '세택(洗宅)'명 목간, '용왕신심(龍王辛審)', '신심용왕(辛審龍王)'명 접시 등에 새겨진 명문은 '삼국사기' 직관지에 나오는 동궁 소속 관청 가운데 세택(洗宅), 월지전(月池典), 월지악전(月池嶽典), 용왕전(龍王典) 등과 관련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63년에 사적 18호로 지정됐던 안압지를 포함한 신라왕궁 별궁터 경주 임해전지는 2011년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바뀐다. 문헌 기록과 출토 유물 등의 재검토를 통해서였다.
바뀐 이름과는 무관하게 이 연못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통일신라의 화려했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해준다.
이는 40년 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많은 관광객들이 동궁과 월지를 포함한 경주의 유적을 찾는 이유일 터.
깔끔하게 단장된 동궁과 월지에 입장하면 연못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천년왕국의 역사 속을 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조그맣게 마련된 야외 전시장에선 월지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유물도 만나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 방문했다면 빼놓지 않고 둘러봐야 할 곳이다.
앞서 말한 동창생들은 하얗게 변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고등학생 시절을 돌이켜보는 듯 동궁과 월지에서 한참을 머물며 추억담 속에 빠져 있었다. 오랜 우정을 간직한 그들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