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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추워도 그릴 수밖에 없던 그림이 있습니다

4.19 민주 묘지에서 내가 만난 조각상들

등록 2023.02.23 12:52수정 2023.02.2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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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사람을 그리는 어반스케치를 하면서 서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생각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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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투사 4.19 민주묘지에 가서 이종빈 작가의 작품을 그렸다. ⓒ 오창환


집에서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로 가는 길이 멀긴 멀다. 지난 18일 돈암동과 미아리를 거쳐서 국립4.19민주묘지 삼거리에서 내리는데, 거의 2시간이나 걸렸다. 4.19 민주묘지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주차장이 있고 연못을 가로질러 광장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광장 입구에는 전찬진 작가의 작품 '상징문'이 있는데 이 문을 경계로 휴게 공간을 뒤로하고 성역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성역 공간으로 들어서면 정말 넓은 광장이 있고, 가운데 사월학생혁명기념탑이 서 있다. 일곱 개의 높은 화강암 기둥 가운데에는 사월학생혁명 기념조각상이 있다. 흔히 4.19민주묘지라는 말보다는 4.19탑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데, 건축 당시 이 탑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정말 거대한 화강석 부조(浮彫)가 기념탑을 에워싸고 있다. 조각의 내용은 단란한 가족이 춤추고 노래하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4월 혁명으로 이루게 된 자랑스러운 조국을 표현하였으리라. 그리고 기념탑 입구에는 양 옆으로 남녀 한쌍의 수호자 상이 각각 있다.

친일 전력 조각가의 작품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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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혁명 기념탑 조각이다. 오른쪽 사진이 수호자상이다. 모두 김경승의 작품이다. ⓒ 오창환


사월학생혁명기념탑은 거대하지만 조화롭다. 한마디로 기념비적이다. 조각상 중에는 특히 수호자상이 인상적이었는데, 원시적 건강성으로 혁명을 수호하려는 것을 표현한 듯하다. 눈두덩이와 입술이 툭 튀어나온 모습이 마치 네안데르탈인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보디빌더 같은 몸매에 왕(王)자 복근을 보면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재미있는 점은 4.19 탑의 배치가 전통적인 풍수지리 사상의 명당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혁명기념탑의 위치는 흔히 묘가 위치하는 혈(穴)자리이고, 부조 조각은 혈을 보호하는 산맥 그리고 수호자 상은 좌청룡 우백호에 해당한다, 4.19 탑 뒤로는 혁명 과정에서 산화하신 순국선열들의 묘가 있고 그 위로 유영봉안소가 있다. 4·19 혁명기념관은 오른쪽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다.

4.19 탑은 대단한 조각임에는 틀림없다. 아쉬운 점은 이 탑을 만든 김경승 조각가(1915~1992)의 친일 전력이다. 그는 1915년 개성에서 출생해서 1939년 도쿄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이때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수상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조각가로 자리 잡았으나, 일본의 식민주의를 노골적으로 찬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해방 이후 홍익대학교와 이화여대 교수를 하였고 국전 심사위원을 하는 등 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서울 남산에 있는 백범 김구 동상과 탑골공원의 월남 이상재 동상, 도산공원의 안창호 동상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동상뿐 아니라 이승만 동상,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김성수나 김활란 등의 동상 등 수많은 동상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 중 황토현 동학 전적지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 동상은 지난 2021년 그의 친일 경력과 부적절한 자세를 이유로 철거되기도 하였다.


어찌 보면 당시에 민족정신이 충만한 시기여서 동상 수요가 많았던 데 반해 딱히 동상을 제작할 만한 역량을 지닌 조각가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앞에서 언급한 조각 외에 중앙 잔디광장 양편 통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12개의 수호예찬의 비도 그의 작품이다.

민주주의 지켜낸 자랑스러운 국민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이자,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4.19 민주묘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군사정부가 주도하여 1963년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면적이 약 3천 평이었으나 1990년대에 김영삼 정부가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여 조형물을 추가하고 약 4만 평으로 확장했다. 묘지 내의 다른 조각들은 이때 세워진 것이다.

요즘도 해만 나면 야외 스케치도 문제가 없는데, 이 날은 해가 없어 날이 흐리고 축축하다. 간이 의자에 앉아서 수호자상을 그리는데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든다. 김경승의 작품이라 너무 복잡한 생각을 갖고 그려서인지 그림이 썩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점심을 먹고 김영삼 정부 시절에 조성된 작품 앞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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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빈 작가의 <자유의 투사> 조각이다. 사실적이고 강렬한 조각이다. ⓒ 오창환

 
9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12미터짜리 대형 조각 두 개가 있는데, 잔디 광장 양쪽으로 놓여있는 이종빈 작가의 '자유의 투사'다. 이 조각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시민들과 이를 진압하는 이승만 정권과 경찰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조각을 전체 다 그리면 인물이 너무 작아지니까 일부 극적인 장면을 중심으로 그렸다. 사실 이날은 4.19 민주묘지에서 어반스케쳐스 서울 챕터 정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는데, 추워서 떠느라 끝나는 시간까지 채색은 엄두도 못 내고 집으로 와서 검은색 단색으로 마감했다.

4.19 민주묘지를 다녀와서 생각했다. 우리 국민은 해방과 전쟁 직후라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자랑스러운 국민이라고.
#4.19민주묘지 #사월학생혁명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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