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잎 고사리는 이렇게 활짝 피면 먹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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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 먹고 말지
혼자 경기 외곽 도시로 가서 일 년쯤 산 적이 있다. 긴 여행이 끝나고 더는 부모님과 한 집에서 살지 못할 것 같아, 떠나간 곳이었다. 봄이 되니 여기저기에서 쑥이 올라왔다.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주변에 쑥이 많다는 말을 흘렸다.
엄마는 반색을 하며, 꺾어서 보내라고 했다. 쑥은 워낙 어릴 적부터 많이 봐와서 잘 알기에 호기롭게 봉다리(봉지보다 봉다리가 여기서는 더 어울린다!)와 가위 하나씩을 들고 쑥을 자르러(?) 갔다.
쑥이 꽤 많은 곳이라 욕심이 났다. 이곳에 있는 걸 다 뜯어서 보내야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보이는 대로 툭툭 잘라 봉다리에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정신없이 마구 잘라 담았는데, 점점 다리에 힘이 빠지고 허리가 아파왔다.
한 번씩 일어나서 허리를 툭툭 치고는 다시 쭈그리고 앉아 쑥을 뜯었다. 너무 큰 봉다리를 준비해 간 걸까. 다 채우고 나니 허리와 다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겨우 서른이었는데 이리 몸이 쑤시다니. 집으로 가져와 신문지 위에 쏟아 놓고 깨끗한 부분만 고르고 다듬었다.
그다음 제일 큰 냄비를 꺼내 물을 넉넉하게 붓고 쑥을 살짝 데쳐냈다. 자취방이라 아무리 크다 해도 라면 두 개 끓일 정도의 냄비밖에 없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물을 끓이고 쑥을 넣어야 했다. 다 하고 나니 해가 저물어 있었다. 하루를 온통 쑥을 뜯고 다듬고 데치는 데 다 쓴 것이다. 그냥 사 먹고 말지. 그때 든 생각이었다.
그 뒤로 나는 아무리 쑥이 지천에 널려 있어도 절대 엄마에게 알리지 않았다. 보이면 눈을 감았다. 저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쑥을 모른다. 엄마는 어릴 적 뚝섬 근처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뚝섬으로 놀러 가 봄나물을 캐면서 놀았다고 했다. 놀잇감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나물을 캐는 게 어쩌면 여자아이들의 유일한 놀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세대가 지고나면
서울에 살던 엄마도 그러했는데, 시골에 살았던 시어머니는 어땠을까. 모르는 나물이 없고, 낯선 산에 가도 무엇이 먹을 수 있고, 무엇이 먹으면 안 되는지, 너무나 잘 아신다. 일부는 뿌리째 뽑아서 마당에 심어 두고 매년 봄마다 캐서 드신다. 섬에는 오지 않으셔도 매년 봄이면, 부지깽이니 두릅이니, 엄나무니 하는 것들을 잔뜩 뜯어서 택배로 보내신다.
그날은 종일 솥에 물을 끓여서 나물을 데쳐야 한다. 힘드시지 않느냐고 조금만 보내셔도 된다고 말해도, 손이 큰 어머니는 늘 박스 한가득 넣어 부치신다. 그렇게 공짜로 얻은 나물은 두고두고 밥상에 초장과 함께 내거나,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 올린다.
어머니 세대가 돌아가시고 나면, 나물은 누가 뜯을까. 우리 세대들 중에 직접 산으로 들로 나물을 캐러 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구분할 줄 아는 사람도 적어 보이고. 초식동물들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알아서 구분해 먹는다는데, 본능이 아니라 학습으로 깨우쳐온 인간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인 것만 같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전문적으로 나물을 재배하는 사람들만 남지 않을까. 재미로, 취미로 봄나물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언젠가 사라지지 않을까. 세상이 참 빨리도 변한다. 근데 나는 그걸 알면서도 왜 고사리를 뜯으러 갈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는 걸까. 사먹고 말지. 아무래도 그날 쑥을 너무 많이 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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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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