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4 04:46최종 업데이트 24.01.1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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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1일 윤석열 대통령이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열린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개막식'에서 축사를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대통령님. 이번이 다섯 번째 반도체 과외입니다. 이제까지는 반도체 팹을 위주로 반도체를 설명드렸는데 오늘은 반도체 팹 옆에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반도체 소부장 업체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소부장이라는 조어의 뜻은 이미 아시죠? 그래도 워낙 상식을 뛰어 넘는 분이니까 왜 소부장이라 부르는지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반도체 팹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소재, 부품, 장비를 공급하는 업체에서 앞 글자만 따서 반도체 소부장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맨 앞에 '소'자가 들어가서 중소기업과 같은 느낌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 초거대 산업군입니다.

반도체 소부장 업계의 현황

그럼 소부장 시장의 구조부터 알아볼까요? 반도체 장비의 경우 한국, 중국, 대만 이 세 나라가 전체 반도체 장비의 80% 가까이를 구매하고 있습니다. 그럼 장비를 파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미국이 독보적인 1위이며 그 뒤를 네덜란드와 일본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 나라가 장비 판매의 85% 이상을 차지합니다.

장비 판매를 국가 단위가 아니라 회사별로 보면 어플라이드 머트리얼스(미국), ASML(네덜란드), 도쿄 일렉트론(일본), 램 리서치(미국), 이 상위 네 개 회사가 전체 반도체 시장의 대략 7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슈퍼을 회사들입니다.
 

한국은 반도체 장비와 소재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데 장비는 미국, 네덜란드, 일본으로부터, 반도체 소재는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대부분 수입합니다. ⓒ 무역협회

 
반도체 소재의 경우 40% 이상을 일본 회사가 공급하고 있습니다. 품목별로는 일본 기업이 실리콘 웨이퍼의 약 60%, 포토마스크나 포토레시즈트 70% 이상이며, 일부 특정 소재의 경우는 90% 이상을 독점 판매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반도체 산업은 실질적으로 특정 국가의 초거대 기업 몇 개가 전체 생태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며, 파운드리 역시 삼성전자가 TSMC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반도체 장비와 소재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세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상황에서 장비와 소재를 국산화한다면 한국 반도체가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반도체 제조는 1980년대부터 시작했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도 반도체 장비와 소재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이후 정부의 정책 지원과 기업의 노력에 힘입어 국산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2010년 이후에는 중견기업들의 인수합병을 통해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덩치도 커졌습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자회사를 만드는 것과 함께 일부 소부장 업체에 지분을 투자하는 방식으로, SK는 하이닉스 인수 후 반도체 소재·모듈을 5대 신성장 사업 중 하나로 선정하는 방식으로 국산화에 힘을 보탰습니다.
 

반도체 공정 중 하나인 식각 공정의 소부장 국산화 수준. 가스와 케미컬의 국산화 진행율이 장비나 다른 부품에 비해 높습니다. ⓒ 반도체소부장산업협력단

 
국산화는 전공정 장비 중에서도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세정과 식각, 증착 공정에서 우리 소부장 업체들의 기술력이 해외 선도기업 대비 90% 정도로 높게 평가 받고 있습니다. 때문에 해당 공정의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율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특히 가스와 케미컬의 경우에는 공급 안정성 확보와 물류비용 절감 차원에서 빠른 국산화가 이뤄졌습니다.

그에 반해 노광과 이온주입 공정은 기술력이 10~20% 수준이라 아직도 거의 대부분 외산 장비와 소재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일부 소재의 경우는 일본이 독과점 공급하는 것들이 있어서 국산화 혹은 공급선 다변화가 시급합니다. 실제로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이후 빠르게 국산화가 이뤄지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으로의 진출은 외국 소부장 업체들의 바람

한국에서 국산화가 많이 진행된다는 건 외국의 반도체 소부장 업체 입장에서는 시장을 잃는 게 됩니다. 그래서 세계 유수의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은 한국에 생산공장을 짓거나 연구센터를 운영하는 식으로 한국 진출에 적극적입니다.


연 매출 28조원의 글로벌 1위 반도체 장비 업체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는 지난 해 7월, 한국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짓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차세대 장비 개발 단계부터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협력하겠다는 의도입니다.

미국 램리서치는 2011년부터 이미 한국에 생산법인을 세워서 국내에서 반도체 장비를 생산 중이고, 도쿄 일렉트론은 2012년 경기도 화성에 R&D 센터를 설립했고, ASML도 2025년까지 화성에 신사옥을 짓고 장비 수리센터 및 교육시설 등을 짓겠다고 발표했으니 세계 반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거대 반도체 장비 회사 네 개 모두 한국에 생산 혹은 연구 시설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일본의 소재업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발표한 후 일부 일본 소재 업체는 한국에 자사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일본 도쿄오카공업이 만든 TOK첨단재료는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가 시작되자 인천공장의 생산량을 두 배로 늘였습니다. 이미 일본의 소부장업체들이 여러 경로로 한국에 많이 진출해 있습니다. ⓒ TOK첨단재료 홈페이지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포토레지스트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인 일본의 도쿄오카공업은 한국 인천에 있는 기존 공장의 생산능력을 2018년의 2배로 늘렸습니다. 반도체 제조용 가스를 생산하는 다이킨공업도 한국에서 제조 공정용 가스 공장을 신설했습니다. 일본의 신에쓰화학공업은 대만에서 포토레지스트를 제조하는 새 공장을 가동해서 한국으로 수출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이후 3년, 한국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솔브레인과 SK머티리얼즈가 초고순도 불화수소 가스를, 동진쎄미켐은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아르곤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국산화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 대만, 중국 등으로 수입선을 다변화하기도 했고, 미국의 소재회사들이 한국에 생산 시설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한국무역협회가 발표한 2018년 대비 2022년 3대 수출규제 품목의 일본 의존도는 포토레지스트가 93.2%에서 77.4%로, 불화수소는 41.9%에서 7.7%로, 불화폴리이미드는 44.7%에서 33.3%로 떨어졌습니다. 일본의 자해로 한국의 소재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일본 소부장 업체들을 대거 유치하겠다는 대통령의 자해

그래서입니다. 대통령께서 지난 21일 국무회의에서 "한일관계는 한 쪽이 더 얻으면 다른 쪽이 그만큼 더 잃는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라며 "용인에 조성될 예정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일본의 기술력 있는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을 대거 유치함으로써 세계 최고의 반도체 첨단 혁신기지를" 이루겠다고 한 말에 제가 경악하는 것 말입니다.

일본의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은 일본 정부가 수출을 막으면 우회로를 뚫어서라도 한국 반도체 회사에 납품을 해야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한국, 중국, 대만이 세계 반도체 생산을 도맡아 하는 가운데 미중 갈등으로 인해 중국으로의 소재 수출이 줄어들면 일본 소재 업체로서는 한국과 대만 말고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왜 굳이 우리가 먼저 혜택을 주면서까지 일본에 손을 내미는 겁니까?

대통령님이 일본 소부장 업체더러 용인반도체 클러스터 마련해 놨으니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면 일본에서는 어떤 회사가 손을 들고 올까요? 가스나 케미컬 업체들이 가장 먼저 들어 올 가능성이 큽니다. 가스나 케미컬 같은 경우는 그 자체가 위험하기도 하지만 운송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을 지 모르는 거라 생산 공장이 반도체 팹과 가까이 있을수록 좋거든요.

그래서 이 분야가 반도체 소재 중 국산화가 제일 많이 된 겁니다. 그런데 정부가 삼성의 반도체 공장 옆에 국민세금으로 국가산단을 만들어 놓고는 일본 소부장 업체를 대거 유치하겠다는 건 일본 업체의 경쟁력만 키워주는 일입니다. 러시아가 가스관을 통해 유럽에 가스를 싸게 공급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일본 기업에 줄 테니까요. 러시아의 가스관은 길기나 하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일본 소부장업체를 들여오면 그건 익스프레스 티켓을 끊어 주는 것과 같은 겁니다. 
 

한국 반도체 장비 회사 중 가장 규모가 큰 세메스의 국산화 장비 소개 페이지. 한국의 반도체 장비는 국산화를 넘어 외국에 수출도 하고 있습니다. ⓒ 세메스 홈페이지

 
한일 반도체 소부장 분야만 본다면 "한 쪽이 더 얻으면 다른 쪽이 그만큼 더 잃는 제로섬 관계가" 맞습니다.

같은 성능을 낸다면 애국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장비와 소재를 쓰는 게 여러가지로 유리합니다. 사실 성능이 좀 부족해도 다른 장점으로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팹 바로 옆에 일본 장비회사와 소재회사가 들어와 있으면 우리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의 경쟁력 하나를 잃게 되는 겁니다. 일본 반도체가 우리보다 역사가 오래 돼서 우수한 부분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걸 지리적 이점으로 상쇄해서 경쟁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일본 업체에게 유리하게 해 주겠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산업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반도체 소부장 자립화 비율은 30%입니다. 그래서 지난 해 7월, 산업부 장관이 직접 동진쎄미켐 발안공장을 찾아 가서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전략'을 발표한 거 아닌가요? 산업부 장관은 그 자리에서 2030년까지 우리나라 소부장 자립화 비율을 50%까지 높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요즘 대통령님과 여러 장관 사이에 서로 말이 안 맞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래도 국가 주요산업에 대한 입장이 이렇게 다르면 안 되는 겁니다.

대통령님의 반도체 정책에 조언을 하는 어느 교수는 일본 반도체 소부장 업체를 한국에 유치하는 걸 두고 남들은 친일이라지만 자신은 일본을 이용하자는 '용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기가 막힌 말장난이지만 그래도 백번 양보해서 용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한국에 진출할 일본의 소부장 업체는 전 세계 점유율 최상위 업체로 자격 제한을 하고, 한국에 공장을 세운 후에는 직원의 일정 수준 이상을 한국인으로 채용하도록 하는 겁니다. 수익의 일부는 반드시 한국에 재투자하도록 조건을 걸구요. 공장 부지는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 용인 클러스터가 아니라 지방의 국가산단에만 입주하도록 제한을 걸어야 합니다. 이 정도는 해야 용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 조성할 용인 클러스터에 일본 업체를 각종 혜택을 주며 유치하는 건 그냥 친일입니다.

일본에 당당해야 해야 할 사람은 바로 대통령
 

지난 3월 21일 오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대통령실에서 생중계로 진행되는 국무회의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그날 국무회의 자리에서 대통령님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이제는 일본을 당당하고 자신있게 대해야 합니다. 세계로 뻗어나가 최고의 기술과 경제력을 발산하고, 우리의 디지털 역량과 문화 소프트 파워를 뽐내며, 일본과도 협력하고 선의의 경쟁을 펴야 합니다."

맞습니다. 일본에게 당당해야 합니다. "선제적으로 걸림돌을 제거"한다면서 일본이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일본은 생각조차 않는 "호응"을 구걸하는 건 당당한 게 아니라 비굴한 겁니다. 국제사회에서 상대에게 당당하려면 우리의 힘을 먼저 길러야 합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힘에서 나오는 겁니다. 일본 소부장 업체가 아니라 우리나라 소부장 업체의 상황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강의를 마치기 전에 한가지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님을 위한 저의 반도체 강의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래서 대통령님이 반도체에 대해서 최소한의 기초상식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반도체 관련 정책에 대해 일체 관여를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은 대통령님이 가만히 있는 게 되레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이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수입을 대체하여 외화를 절약하고 있는 우리의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을 대신해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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