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7 07:11최종 업데이트 24.01.17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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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5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반도체관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세 번째,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에서 마무리 발언을 하고 있다. 2024.1.15 [대통령실 제공] ⓒ 연합뉴스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을 주제로 한 민생토론회를 봤습니다. 대통령님은 그 자리에서 총 622조 원이 넘는 투자로 경기 남부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했죠. KBS는 <윤 대통령 "세계 최대 반도체 메가클러스터에 622조 원 투자…일자리 3백만 개 창출">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습니다.

지난해 발표한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300조 원만 해도 역대급 규모인데, 우리나라 한 해 예산과 맞먹는 금액인 622조 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해서 산업부의 보도자료를 찾아봤습니다.


KBS의 기사 제목만 보면 대통령님이 622조 원을 투자하는 것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대통령님도 알고 저도 알고 해당 기사를 쓴 KBS 기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 금액은 반도체 관련 민간 기업들이 향후 2047년까지 23년 동안 투자하겠다는 금액을 모두 다 더한 거니까요. 민간 기업의 투자계획을 대통령님이 발표한 것뿐입니다.

622조 원이 그동안 없던 새로운 계획도 아닙니다. 산업부가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니 "2047년까지 총 622조 원 투자 통해 팹 16기 신설 계획"이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첨부된 표를 통해 대략적이나마 그 금액이 어디서 나온 건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반도체 팹 투자' 핑계로 대통령이 하겠다는 일
  

662조 원이 어디서 나온 건지 확인할 수 있는 산업부의 자료. 민간 기업들이 투자 발표한 내용을 모아 반복해서 발표한 게 대부분입니다. ⓒ 산업부

 
먼저 용인 남사의 360조 원 삼성 파운드리 팹은 지난해 내내 우려먹었던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300조 원'에 60조 원을 더한 것입니다. 평택의 120조 원 시스템 반도체 팹은 2022년부터 이미 계획되어 있던 P4, P5, P6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KAIST 연구 허브가 추가되었기 때문인지 애초 삼성전자의 발표 당시보다 20조 원이 더해졌습니다. 용인 원삼의 122조 SK하이닉스 팹은 무려 2019년에 발표된 사업입니다. 사실 반도체 클러스터라는 말도 그때 SK하이닉스가 먼저 썼고요.

이처럼 '622조 원 투자' 가운데 상당 부분은 대통령님이 불리할 때만 호출하는 '전 정권' 시기인 2019년에 발표된 것부터 아직 완공되지 않은 민간 기업의 반도체 팹 투자 계획을 모두 더해 대통령님 입으로 발표한 것일 뿐입니다. 

대통령님이 연초에 국민들을 만나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현황을 이야기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 민간 기업들의 반도체 투자를 통해 이런 식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원전이 아니면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전력을 댈 수 없다는 윤 대통령 ⓒ KTV

 
제가 걱정하는 건 민간 기업들이 하겠다는 투자가 아니라, 그 투자를 핑계로 대통령님과 정부가 하겠다는 일들입니다. 대통령님은 토론회에서 "반도체 파운드리 라인을 하나 구축하는 데 1.3GW(기가와트)의 원전 1기가 필요하다"라며 "탈원전을 하면 반도체뿐만 아니라 첨단 산업을 포기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핑계로 원전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산업부의 보도자료에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공급계획"이 나와 있습니다. 향후 필요한 전력은 10GW인데, 초기수요 3GW는 LNG발전소 6기를 세워 충당하고, 나머지 7GW는 2037년 이후 호남의 재생에너지와 동해안의 원전을 활용하겠다고 되어 있습니다.
  

초기수요 3GW는 LNG발전소 6기를 세워 충당하고, 나머지 7GW는 2037년 이후 호남의 재생에너지와 동해안의 원전을 활용하겠다고 되어 있습니다. ⓒ 산업부

 
저는 오늘 민생토론회의 핵심 내용이 바로 이거라고 봤습니다. 동해안에 원전을 세우고 경기도 용인까지 송전탑을 세워 전기를 끌어오겠다는 것 말입니다. 이걸 위해 "송전선 인허가 일괄처리제"를 신규 도입해서 송전탑 설치를 쉽게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미 법안이 제출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제정을 통해 송전선로 건설 기간을 30% 이상 단축할 예정"이라는 게 정부의 공식 입장입니다.

대통령님에게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못 알아들으신 것 같아 다시 이야기하자면 LNG 발전소에서 나온 전기를 쓰면 RE100 못 맞춥니다. 원전도 마찬가지고요. LNG나 원전은 재생에너지가 아니니까요. 반도체 클러스터에 사용할 전력으로 LNG발전이나 원전을 이용한다면 2030년 이후, 용인 클러스터의 삼성 팹에서 나온 반도체는 2030년까지 넷제로 달성을 선언한 애플에 팔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애플의 넷제로는 공급망에서부터 사용자에 이르기까지 탄소 중립을 이루겠다는 의미니까요.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데 대통령님은 외국 정상을 만났을 때 자기 나라에 파운드리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 "이 나라에 원전이 몇 기나 있습니까"라고 물어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반도체 팹을 만들려면 원전이 필수적이라면서요.

반도체를 공부하는 학생과 전문가들을 앞에 앉혀 놓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원전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님에게 그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나 보네요.

제가 있는 싱가포르만 해도 반도체 팹이 16개가 넘는데 원전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 반도체 팹이 몰려가고 있는 독일도 탈원전 선언해서 작년부터 가동 중인 원전이 하나도 없고요. 이탈리아에도 반도체 팹이 여럿 있는데 거긴 체르노빌 원전 폭파 사건 이후로 세계 최초로 탈원전 선언했던 나라입니다. 원전은 반도체 산업에 필수가 아니라 이젠 RE100 때문에 선택사항에서도 빠지고 있는 중입니다.

외국은 반도체 팹 분산시키는데... 왜 거꾸로 가려 하나?
  

반도체 산업이 클러스터 국가대항전 형태로 전개중이라는 산업부의 설명. 미국 관련 “설계에서 제조로, 전 국토의 클러스터화 추진”이라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 산업부

 
산업부는 보도자료에서 "반도체 산업 전쟁은 클러스터 국가대항전 형태로 전개 중"이라며 우리도 클러스터에 다 끌어모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대만, 미국, 독일 등을 사례로 들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반도체 팹과 연관 산업들을 한 군데에 다 몰아넣어서 클러스터를 만들고 있을까요?

산업부는 일본을 두고 "구마모토현을 日 반도체 산업 재건 클러스터로 조성"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만 기업 TSMC가 팹을 건설 중인 곳은 일본 열도의 최남단 구마모토 맞습니다, 그럼, 미국 기업 마이크론 역시 구마모토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200km 이상 떨어진 히로시마에 있습니다. 일본 전자 업체가 연합하여 만든 라피더스는 구마모토에서 2200km 이상 떨어진 일본 열도의 최북단 홋카이도에 있습니다.

대만 TSMC만 해도 경상도 크기만 한 대만에서 팹을 한군데 모아 놓지 않고 신주, 타이중, 타이난, 가오슝… 이렇게 분산시켜 놨습니다. 미국에 대한 설명은 저를 좀 웃겼습니다. "설계에서 제조로, 전 국토의 클러스터화 추진"이랍니다. 우리도 미국을 따라 전 국토의 클러스터화를 추진하면 안 되겠습니까?

실제로 대부분의 반도체 제조 국가들은 반도체 팹을 최대한 분산시켜 놓는 추세입니다. 다국적 반도체 기업들의 자사 반도체 팹을 서로 다른 나라에 만들기도 합니다. 인텔만 해도 미국 외에 아일랜드와 이스라엘에 별도의 팹이 있고 독일에 신규 팹을 추진 중입니다. 패키징 시설은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에 분산해서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반도체 관련 모든 업체를 수도권 근처 한 지역에 억지로 모아 놓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인텔의 반도체 제조시설. 팹 하나당 투자금이 워낙 크기 때문에 한군데 몰려 있다가 사고가 나면 회복이 불가능해서 분산 배치를 합니다. ⓒ 인텔

 
세계 최대의 클러스터를 만들겠다는 건 듣기에만 그럴듯할 뿐 자연재해나 군사 분쟁 혹은 가스 폭발 같은 대형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제대로 손도 써 보지 못하고 함께 몰락할 수 있는 극히 위험한 방식입니다. 수도권 집중에 대한 우려와 지역 균형 발전 원칙 위배에 대한 비판을 막기 위한 말장난이 "세계 최대의 클러스터"라는 허울 아닌가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산업부는 부족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2037년 이후 호남의 재생에너지를 사용할 계획도 세워 놓았습니다. 호남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를 수도권까지 송전탑을 세워 끌고 가는 것 보다 반도체 팹을 호남에 짓는 게 휠씬 수월한 방법 아닐까요?

대통령의 의욕, 불안하다

대통령님은 반도체 클러스터로 인해 "앞으로 20년에 걸쳐서 최소한 양질의 일자리가 300만 개는 새로 생길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양질의 일자리가 왜 꼭 수도권에만 생겨야 하는 지에 대해 답을 듣고 싶습니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어서 고향을 버리고 수도권으로 몰려드는 지방의 청년들 역시 대통령님이 챙겨야 할 우리 국민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수도권에는 양질의 일자리를, 동해안과 호남에는 경기도에서 사용할 전기 생산과 송전을 위해 원전과 송전탑을 나눠 주는 것은 누가 봐도 불공정한 처사입니다.

대통령님은 민생토론회에서 "국가안보실 안에 경제 안보와 첨단기술 안보를 담당하는 제3차장직을 신설했다"면서 "반도체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연초부터 대통령님이 직접 나서서 이미 발표했던 투자계획을 재탕하고 부풀리면서까지 반도체에 대해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전 불안합니다.

반도체 산업보단 원전 산업에 더 관심 있어 보이고, 지역 균형발전보단 수도권 개발사업에 더 집중하는 듯한 대통령님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도체 산업에 간섭하고 챙기다간, 서울-양평간 고속도로 계획처럼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도 제 갈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겁니다.
  

2000년과 2021년 상위 20개 글로벌 반도체 수입국. 20년 전에는 미국이 1위였지만 2021년은 중국이 압도적 1위입니다.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끝으로 대통령님은 "비싼 물건을 파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라며 최첨단 반도체를 통해서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은 세계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국이며, 금액을 기준으로 세계 5위의 반도체 수출국입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23년 보고서) 그럼 세계 최대의 반도체 수입국은 어디일까요? 전체 반도체 수입의 54%에 이르는 중국(홍콩 포함)입니다.

대통령님의 바람대로 비싼 반도체를 만드는 건 우리 기업들이 이미 잘하고 있는데 그걸 팔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님이 중국을 적대시하고 자꾸 자극하면 우리가 반도체를 판매할 시장의 문을 자꾸만 닫는 행위입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되는데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먼저 꺼내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가장 힘든 건 우리 반도체 산업입니다. 다 떠나서 "반도체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대통령이 직접 챙기겠다"는 결정만큼은 재고해 주기를 바랍니다. 도움이 전혀 안 돼서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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