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31 07:08최종 업데이트 24.01.31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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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5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반도체관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세 번째,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에서 박수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통령을 위한 반도체 특별과외'가 벌써 스물다섯 번째네요. 취임 직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반도체와 관련 산업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대통령님은 제가 가르쳐 준 내용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대통령님은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제 이야기 대신 보수언론이 하는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보수언론들은 대통령님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 혹은 든든한 광고주가 되어 주는 재벌의 이익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주로 하느라, 실체적 진실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18일, <중앙일보>에 <한국도 대만도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이제 정치력 필요할 때> 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대통령님이 민생토론회에서 "세계 최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있다"고 발언했는데, 최근 대만 총통으로 당선된 라이칭더 역시 "대만에 (반도체) 종합 클러스터가 구축되게 지원하겠다"고 이야기했다는 내용입니다.
 

<중앙일보> 1월 18일 자에 실린 <한국도 대만도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이제 정치력 필요할 때> 기사 ⓒ 중앙일보 PDF

 
해당 기사만 보면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세계 선두 경쟁을 하는 두 나라의 정상이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라는 같은 정책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통령님이 말하는 클러스터와 라이칭더가 말하는 클러스터는 정말 같은 걸까요? <중앙일보>는 같은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클러스터의 의미를 두고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일정 지역에 모여 집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자국 생태계를 빈틈없이 살찌워 '반도체 초격차'를 만들겠다는 전략"이라고 기사에 썼거든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통령님의 클러스터와 라이칭더의 클러스터는 이름만 같을 뿐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겠습니다.

라이칭더의 클러스터와 윤석열의 클러스터, 어떻게 다른가

먼저 대통령님의 클러스터는 단순합니다. 특정 지역, 즉 수도권에 반도체 관련 기업과 학교, 관련 기관을 다 모아 놓겠다는 거니까요. 산업부의 발표를 그대로 옮기자면 이렇습니다.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는 경기 평택·화성·용인·이천·안성·성남 판교·수원 등 경기 남부의 반도체 기업과 관련 기관이 밀집한 지역 일대를 의미한다.", "메가 클러스터는 2102만㎡ 면적에 '30년 기준 월 770만 장의 웨이퍼를 생산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등 세계 최대 규모이다." 그러니까 대통령님의 클러스터는 수도권이라는 '지역'과 2102만㎡라는 '면적'으로 모두 설명이 가능한 거죠.
 

우리 정부가 만들겠다는 메가 클러스터. 반도체 팹과 관련 기업을 수도권에 모아 놓는 게 핵심입니다. ⓒ 산업부

 
그럼, 라이칭더의 클러스터는 어떨까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보도한 라이칭더의 말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총통으로서 저는 재료, 장비, 연구 개발, 집적 회로 설계에서 웨이퍼 제조 및 테스트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계속 지원하여 대만에 포괄적인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더욱 발전시킬 것입니다. 이는 물론 세계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라이칭더는 대만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TSMC 본사가 있는 대만 북부의 신주 과학단지에 몰아넣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1.4나노 공정의 최첨단 신규 팹이 들어설 대만 중부의 타이중에 클러스터를 만들겠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기존 팹이 있는 남부의 타이난이나 가오슝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라이칭더의 클러스터는 대만의 특정 지역에 반도체 팹과 관련 업체들을 모아 두는 게 아닙니다. 그냥 대만을 반도체 클러스터로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말한 겁니다.
  

“칩메이커 TSMC, 대만 선거에 긴 그림자 드리우다”라는 제목의 파이낸셜 타임스의 기사 ⓒ 파이넨셜 타임스 보도화면

 
라이칭더가 왜 이 이야기를 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지난해 12월, <파이낸셜 타임스>는 <칩메이커 TSMC, 대만 선거에 긴 그림자 드리우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엄청난 에너지와 물을 사용하고 기후변화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반도체 팹을 재생에너지가 부족한 대만에 지을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가 높다고 보도했습니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외국에 TSMC를 지으라는 겁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반도체산업이 재생에너지가 부족한 대만에서 3D 업종 취급을 당하는 거죠.

대만을 둘러싼 바깥의 상황도 만만치 않습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 아래 외교적, 물리적 위협을 가하고 있고, 미국은 TSMC의 생산기지를 미국에 만들 것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안팎으로 위기 상황인 것입니다.


라이칭더는 이런 상황에서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세계의 공동 자산"이며, "대만은 이걸 지킬 책임이 있다", "중국과 다른 나라들도 글로벌 칩 산업에서 대만의 역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중국의 위협과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반도체 회사는 대만에 두겠다는 겁니다. 라이칭더의 당선 이후 보조금이나 유무형의 압박에 의해 대만의 반도체 팹을 미국이나 일본에 내보내는 일은 보다 신중해 질 겁니다.

반도체 팹 하나 내보내지 않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재료, 장비, 연구 개발, 집적 회로 설계, 제조에서 웨이퍼 제조 및 테스트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산업의 모든 분야가 모여 있는 진정한 의미의 반도체 클러스터로 만들겠다는 게 라이칭더의 목표입니다.

대만의 특정 지역이 클러스터가 아니라 대만 자체가 반도체 클러스터가 되는 겁니다. 그 위치가 대만 북쪽 끝 신주가 되든, 남쪽 끝 가오슝에 있든 상관없습니다. 단순히 특정 지역에 반도체 산업을 모아 두겠다는 대통령님의 클러스터와 반도체 관련 산업을 모두 대만에 두고 지키겠다는 라이칭더의 클러스터가 얼마나 다른지 이해가 되나요?  
 

대만과 세계 각국에 세워진 TSMC의 팹을 소개하는 포커스 타이완의 2023년 8월 기사. 대만 안에만 해도 서로 다른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포커스 타이완 보도화면

   
<중앙일보> 기사의 진짜 목적

그럼, <중앙일보>는 왜 한국과 대만의 클러스터가 서로 다른 의미라는 건 애써 외면하고 대통령님의 수도권 클러스터를 띄우는 기사를 썼을까요?

반도체 팹은 많은 전력을 사용합니다. 대통령님은 그걸 원전을 통해 조달하겠다 했고요. 동해안에 원전을 세우고 거기서 수도권까지 전력을 끌어오려면 송전탑을 많이 세워야 합니다. 밀양 송전탑 사태 이후 그게 쉽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요. 송전탑 설치를 수월하게 만들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 기사를 쓴 셈입니다.

국민의힘 김성원 의원이 대표발의한 해당 법안은 국무총리실 산하에 국가기간 전력망확충위원회를 두고 34만 5천 볼트 이상의 무탄소 전원(원전·신재생) 등의 핵심 전력망 사업의 경우, 입지 선정과 준공 등 관리뿐만 아니라 갈등·분쟁 조정 및 중재 등에 대한 심의·의결 권한을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송전탑 건설 과정에 지자체의 의견, 지역주민의 권리, 환경단체 등의 대안은 쉽게 무시되고 정부가 정한 대로만 사업이 진행될 것입니다. 송전탑 건설은 빠르게 진행되겠지만 환경파괴와 송전탑이 들어설 지역주민의 피해는 제대로 고려되지 않겠지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안의 주요내용 - "속도감 있는 사업추진을 위해 인허가 절차를 대폭 개선하"겠다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 국회의안정보시스템 갈무리

 
<중앙일보>는 "이런 법안의 통과 여부는 한국 반도체 생산 주문을 고려하는 외국 고객사에게 중요한 시그널"이라는 김성원 의원의 발언을 전했습니다. 이 발언은 역으로 맞습니다. 원전에서 생산된 전력을 수도권으로 옮길 송전탑을 쉽게 세울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된다면 한국 반도체 회사들이 RE100(재생에너지 100%)을 달성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할 "중요한 시그널"을 외국 고객사에 주게 될 겁니다. 결국 다른 나라로 발길을 옮기겠지요. 원전에서 생산된 전력을 가지고 팹을 운영하면 거기서 나온 반도체를 RE100 달성을 요구하는 주요 고객사에 판매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죠?

해당 기사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전력을 제때 공급하기 위해 송전탑을 쉽게 건설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만 했지, 그렇게 만들어진 송전탑 때문에 기업들이 생산한 제품을 판매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반도체 팹을 수도권에 모두 모아 두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홍수가 나서 도로가 유실되면 부품이든 소재든 제때 공급을 못해 가동을 멈출 수 있습니다. 가뭄이 들어 용수가 부족해져도 가동을 못 하겠지요. 태풍이 불어 송전탑이 쓰러져 전기 공급이 안 되면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하기도 싫지만, 지진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자연재해만 해도 우리나라의 팹 모두가 가동을 못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예기치 못할 사고나 우리 사회의 혼란을 노린 세력의 무력도발 등도 경우의 수에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본만 해도 최북단 홋카이도부터 최남단 구마모토까지 팹들이 고루 흩어져 있고, 이번에 비교 대상이 된 대만도 나라 자체가 작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최북단의 신주에서 최남단의 가오슝까지 분산 배치되어 있습니다. 하나당 최대 50조 원까지 투자해야 한다는 그 비싼 팹들을 물리적으로 한군데에 모아 놓는 걸 두고 클러스터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공업단지일 뿐입니다.

"대통령님,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셔야 합니다"

진정한 반도체 클러스터는 반도체의 연구개발부터 설계, 소부장(소재·부품·장비)과 팹, 패키징과 테스트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상태를 말합니다. 라이칭더가 대만에 하겠다는 게 바로 이거구요. 전문 인력이 필요한 연구개발과 설계는 분당이든 용인이든 사람 많은 곳에서 하고, 전력을 많이 쓰는 반도체 팹은 호남이든 경남이든 재생에너지 생산이 용이한 곳에서 하면 됩니다. 굳이 전력 생산지로부터 먼 곳에 팹을 지어 전국 곳곳에 송전탑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패키징이나 테스트는 구미나 광주처럼 기존의 공단이 조성되어 있는 곳에서 하면 됩니다. 지역은 제가 임의로 정한 거니까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합니다. 미국에서 설계한 반도체를 대만 팹에서 생산하고 말레이시아에서 패키징하는 시대에 우리나라 안에서 지역별로 반도체 산업 단지가 떨어져 있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앙일보> 같은 보수신문만 골라서 보다 보면 대통령님의 클러스터와 라이칭더의 클러스터가 비슷해 보이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매번 과외를 하는 겁니다. 이제 두 클러스터가 얼마나 다른지 알았으니 지금이라도 수도권에 반도체 팹을 죄다 모아 놓은 단순한 공업단지는 포기하고, 반도체 생태계가 살아 숨 쉬는 제대로 된 클러스터를 위해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기 바랍니다. 수도권 말고 우리나라 전체가 반도체 클러스터가 되는 꿈, 멋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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