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는 해탈
이선민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혼자 있으면 원 없이 망가질 수 있는데 일단 집에 개가 있으니까 전처럼 마음껏 망가질 상황이 안 됐다. 개는 말이다. 내가 전날 밤을 새웠든 말든 아침에 눈을 뜨면 밖에 데리고 나가야 한다. 게다가 상대가 개다. 사람이라면 앉혀두고 오늘은 이만저만 해서 산책을 나갈 수 없다고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겠지만 개한테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내 마음이 어떻든 개랑 사는 동안은 무조건 나가야 한다. 희한한 게 이렇게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고 나면 기분이 어느 정도 괜찮아진다. 전에는 어쩜 그렇게 방에서 현관까지 나가는 게 힘들던지. 집이 넓으면 말도 안 한다. 손바닥만한 데 살면서 운동화 신는 거까지가 그렇게 괴로웠다.
개랑 있다 보니 뭉그적거릴 겨를이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가야 했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면 희한하게 또 밥 한술 뜨게 되고 그러면 잠을 좀 자고 그러다 보면 기분이 어느새 좋아졌다. 언젠가 한 번은 산책 나가자는 개를 외면하고 돌아누웠더니 우리 개 복주가 글쎄, 내 앞에 신발을 물고 와 "탁" 하고 던졌다. 해가 중천인데도 보호자가 꿈쩍도 안 하자 제 딴에는 뭐라도 한 번 해본 모양이다.
그 생각을 하니 기특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그래 나가자 내가 졌다"고 했다. 강제로 나가 개가 좋아하는 야산을 함께 걸으니 저간의 시름이 절로 잊혔다.
또 개와 종일 붙어있다 보니 따로 시간을 정해 놓고 일하지 않으면 도무지 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개 때문에라도 나는 전보다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됐다. 누가 돈 주고 시켜도 이렇게 잘할 수 없다 싶게 최선을 다해 시계처럼 산다. 그러자 봄이 와도 이전처럼 누굴 죽이고 싶다거나, 죽고 싶다거나 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게 됐다.
요즘은 가끔 개를 보며 이 친구도 나와 살기 위해 나만큼 노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맞는 말이지. 개는 개대로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이빨도 뭉툭하고 털도 없는 덩치 큰 동물이 자꾸 자기 보고 앉아라 말아라, 하는 것이. 아마 개가 말을 못 해 그렇지 내 생활 방식에 자신을 맞추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거다.

▲ 쉬고 있는 복주
이선민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까, 복주는 한 삼개월 걸린 것 같고 해탈이는 아직 적응 중인 것 같다. 그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서로 지극히 동물적인 언어로, 그러니까 눈빛과 손짓 만으로 어떤 게 되고 어떤 건 안 되는 건지 확인하며 왔으니까. 덕분에 이제는 전보다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또 이런 상호 간의 적응 과정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동거는, 그러니까 사람이라 해도 각기 다른 영혼이 한데 모여 사는 데는 어느 한쪽만의 희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우리 개가 나를 일방적으로 참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그것은 '반려'라고 볼 수 없고 동거라고 부를 수 없다. 또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내가 개를 일방적으로 참아야 한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함께 어울려 산다는 건 모두 적당히 조금씩 참으며 지내는 일 같다.
간혹 사람들은 내가 유기견을 기른다고 하면, 그것도 두 마리나 기른다고 하면 다들 하나같이 "참 좋은 일 하시네요"라고 한다. 그런데 내 생각은 다르다. 좋은 일은 내가 아니라 개들도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개들 역시 나를 정서적으로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이란 게 꼭 누군가 흘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행위만을 칭하는 건 아닐 것이다. 숨 죽이고 우는 내 손등에 가만히 자기 턱을 기대는 우리 개 역시 나를 돌보고 있는 거니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
2018년 "세월호가 지겹다는 당신에게 삼풍 생존자가... "라는 게시글 하나로 글쓰기 인생을 살고 있는 [산만언니] 입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마음이 기웁니다. 재난재해 생존자에게 애정이 깊습니다. 특히 세월호에 깊은 연대의식을 느낍니다. 반려견 두 마리와 살고 있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