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의 속사정, 회생법원 사람들 이야기

등록 2023.06.23 13:32수정 2023.06.2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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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 일일수록 중립적인 입장에서 처리해야 한다. 누군가의 평범한 루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운명의 하루가 될 수도 있다. 특히 공적인 업무영역에서 담당자의 평범한 하루는 어려운 처지의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중대한 기로가 될 수도 있다.

법원은 늘 다툼과 분쟁의 전운(戰雲)이 감도는 곳이다. 당사자주의가 원칙인 재판업무의 특성상 갈등과 이해관계는 상존한다. 민사소송에서의 원고와 피고는 물론이고 형사소송에서도 검사와 피고인이라는 당사자 대립구조가 유지된다.

회생법원의 회생과 파산업무는 성질상 비송사건의 영역에 속한다. 비송사건은 소송의 당사자주의가 적용되지 아니하고 직권탐지주의가 원칙이다. 하지만 원고와 피고가 서로 대립하는 당사자 구조가 아닐지라도 회생이나 파산 신청인(채무자)과 불이익을 받는 채권자들 간의 갈등상황과 감정대립을 바라봐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 때문에 회생법원의 구성원들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회생법원에서는 판사와 법원공무원(회생위원 포함), 관리위원과 파산관재인 등이 함께 일을 한다. 이들은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지원 및 보조 역할을 하며 법인회생/파산, 개인회생/파산 사건을 처리한다. 회생/파산 제도가 추구하는 이상과 불편한 현실 사이에서 저녁을 밝혀 일하는 이들의 애로와 고충, 그들만의 속사정을 들어본다.

접수담당 공무원 K의 하루

K의 업무는 신청사건을 접수받아 해당 재판부나 회생위원에게 인계하는 역할이다. 단순하게 사건을 접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청인들이 접수단계에서 묻는 다양한 업무절차 등을 말해줘야 한다. 그러다보니 역설적으로 말없이 서류만 접수하고 돌아서는 민원인이 고마울 때가 많다.

K가 접수받은 신청서는 바로 뒤편에 위치한 다른 직원들에 의해 필수적 사항이 입력되고 사건 유형(개인회생/파산, 법인회생/파산)에 따라 담당 재판부나 회생위원에게 배분된다. 때로는 9시가 되기 전부터 줄을 서있던 민원인들과 점심시간이 임박한 11시 55분에 도착한 신청인 때문에 불편할 때도 있으나, 그들의 어려운 상황에 비추면 본인의 사정은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다.


회생이나 파산 절차는 접수 시부터 상당한 시간을 요함에도, 어떤 신청인들은 마치 등기사항증명서나 인감증명서 발급하듯이 신속한 처리를 요구한다. 답답한 마음에 업무처리절차에 대해 대략적 설명을 해도, 가끔은 듣기 험한 말로 되돌아올 때는 시쳇말로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오기도 한다.

"접수업무를 담당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접수단계에서 이 사건이 언제 처리되느냐, 부족한 서면은 있는지 확인해줄 수는 있느냐, 어떻게 결론이 날 것 같으냐... 등의 신청인의 질문입니다. 하지만 접수 담당 공무원 입장에서는 어느 것 하나 쉽게 답변할 수 없는 것이어서, 접수 이후의 후속 절차를 설명해드려도 가끔은 막무가내 식으로... 이런 것도 얘기 못해주면서 이 자리에 있느냐... 라는 질책이 돌아올 때는 많이 불편합니다."

그럼에도 회생파산 절차를 통해 새롭게 경제활동을 시작한 이들이 남기는 한마디. '선생님,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라는 감사인사 때문에 보람을 느낀다. 그런 밝은 인사를 받을 때에는 조심스럽게 '다시는 회생법원에 오지 마세요. 건강한 새 출발을 기원합니다!'라고 마음속 답례를 한다.

종합민원실에는 사건접수, 열람복사, 제증명 등을 처리하는 공무원들과 NEW START 상담센터 상담위원이 근무하면서 회생 파산 신청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회생위원 Y의 하루

회생위원은 개인회생사건을 담당한다. 사무관인 회생위원 Y는 출근하는데 1시간 30분이 걸린다. 유명한 2호선 지옥철에서 유체이탈을 경험한다. 아침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마시는 커피는 쓰디쓰다. 채무자들이 제출한 서면과 변제계획안을 검토하며 마시는 커피는 더 쓰다. 전자신청으로 접수된 사건을 두 대의 PC 모니터로 보노라면 눈마저 시리다. 일찌감치 찾아온 노안이 원망스럽다.

매일 새로운 사건이 4~5건씩 쏟아진다. 배정된 사건 수와 비슷하게 일을 처리하지 못할 경우 미제는 쌓여간다. 출근하자마자 옆자리의 다른 회생위원과 눈인사만 나누고 자신의 사건에만 집중한다. 새로 접수된 사건을 정리하고, 진행 중인 사건의 부족한 사항에 보정명령을 내리고, 결재를 올린 사항의 승인 여부를 살피다 보면 벌써 점심시간이 코앞이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은 우르르 구내식당으로 향한다. 메뉴선택의 자유는 없지만 메뉴선택의 고민 또한 없어서 편하다.

개인회생의 경우 변제계획안을 작성하고 그것을 심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변제계획안에는 자신과 가족의 생계비를 제외하고 미래소득으로 3년 동안의 변제계획이 들어있어야 한다. 양심적인 신청인도 있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오죽하면 그러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 그만큼 피해를 보는 채권자들의 입장을 헤아리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빠른 진행을 위해 전화를 들고 채무자(혹은 그 대리인)에게 추가 입증을 요구한다. 때로는 전화기 저편에서 '거 대충 좀 하지. S%#&'라는 거친 욕설이 날아오기도 한다. 월급쟁이의 비애 + 공무원의 설움이 분노의 쓰나미로 밀려온다.

"회생위원으로서 가장 힘든 점은 뻔히 속내가 보이는 사건임에도 서면만 보고 사건을 처리해야 될 때죠. 보정명령을 내릴만한 법적인 근거가 분명한데도 딱한 사정이라는 심정적인 이유로 업무를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계속 비슷한 사건을 처리하다보면 무감각해질 때가 있는데, 이때가 조심스럽죠. 가능한 한 하나의 사건을 개별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최대한 감정 중립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서울회생법원에서는 내부와 외부회생위원 40여명이 한 달 평균 약 2천 건씩 접수되는 개인회생사건을 처리하고 있다. 이들에게 야근은 필연적이다.

파산 담당 판사 J의 하루

회생법원에서 판사들은 법인회생파산 사건과 일반회생, 개인파산업무를 번갈아 맡는다. 회생파산 업무의 전문성과 제반 관련 업무지식은 필수적이다. 당사자의 이해관계와 분쟁을 판결하는 절차보다 채무자와 채권자의 유불리가 분명한 비송절차에서는 엄정한 판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회생법원은 전문법원으로 판사들 사이에서도 가장 인기가 좋아 전입경쟁이 치열하다.

법인회생 파산은 신청사건 수는 적지만 적격심사를 둘러싼 이해관계와 파급효과는 막중하다.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기업들의 생사존망에 관한 문제는 국가경제는 물론 시민들의 생계와 밀접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법인사건은 판사 3인이 합의체를 구성하는 합의부에서 담당한다. 최근에는 부동산경기 침체로 인한 건설회사의 회생 파산 신청이 눈에 띠게 늘고 있다.

개인파산 신청사건에서 파산여부의 심사는 엄격하다. 채무자의 입장만 고려하기에는 채권자의 불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아무리 채무자회생법이 채무자 친화적인 법률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채무자들에게는 실질적인 재기를 위한 신용교육도 필수적이다. 파산면책이 채무자들에게 부정적 의미의 재테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재파산 신청비율이 늘어나는걸 보면 보다 적극적인 입법과 실효성 있는 정책의 필요성을 절감(切感)한다.

파산선고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청인의 입장을 헤아리면서도 심사와 판단의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채무자 쪽에 감정이입이 지나치다 보면 채권자들의 불이익에 대해 눈감는 불합리가 발생할 수도 있다.

"업무를 처리하면서 힘든 점은... 밤늦게 사무실에서 검토하다 중단한 사건이 눈에 밟힐 때죠. 집으로 일을 가져오면 안 되는데도 잠자리에서도 파산신청 인용여부에 대해 판단이 꿈속에서 재현되기도 합니다. 마치 사건감옥에 갇힌 것 같은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가끔씩 심리적 허기가 찾아옵니다. 어젯밤의 결론과 오늘 오전의 그것이 달라질 때도 있는데, 그만큼 내면의 갈등과 고민이 치열합니다. 그럼에도 법복이 주는 준엄한 헌법적 가치와 소명을 감정적으로 소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서울회생법원에서는 법원장을 포함한 판사 36명이 법인회생/파산사건과 개인회생/파산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한 달 평균 25건 정도의 법인회생사건, 50~60건 정도의 법인파산사건, 700건 내외의 개인파산사건이 접수되고 있다. 이들에게 야근은 당연한 일상이다.

참여관과 실무관, 관리위원과 파산관재인... 그리고 숨은 법원가족들

회생법원에는 법인회생/파산과 개인파산을 담당하는 파산과와 개인회생을 전담하는 개인회생과가 있다. 각 과에는 재판부 참여관들과 실무관들이 판사들과 회생위원들의 업무처리를 지원하고 보조한다. 이들은 조서작성과 각종 송달과 통지 등 법률적으로 누락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절차를 담당한다. 거미줄처럼 얽힌 이들의 세심한 역할은 복잡다단한 회생파산 업무가 원만하게 진행되기 위한 윤활유 역할을 한다.

관리위원은 전직 기업재무나 금융전문가들로 법인회생과 파산사건에서 판사들의 심사를 돕고 각 사건의 적격여부를 판단한다. 파산관재인은 주로 변호사들로 법인파산이나 개인파산사건에서 파산재단의 관리와 환가, 배당 등의 절차를 담당한다. 그리고 회생법원에는 청사와 법정 보안을 담당하는 보안관리대원들과 깨끗한 환경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 공무직 공무원들이 있다. 이들의 섬세하면서도 숨은 노력은 회생법원과 채무자회생법이 추구하는 이상과 불편한 현실의 격차를 줄여주고 있다. 법원은 서면으로 신청하고 서면으로 응답하는 냉정한 공간이지만, 그 샛길로 따뜻한 인간의 온정이 흐른다.

문득, 중국의 계몽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 1873~1929)의 명문장이 떠오른다.

"국가는 국민에게 이익을 주고 보호하는 영원한 선이며, 정부는 국가의 도구로서 국가의 가치에 충실한 존재의의를 갖는다."

2023년, 우리의 국가와 정부는 양계초가 말하는 영원한 선과 도구로 존재하고 있을까? 정부의 구성원인 우리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필자는 회생법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개인 브런치스토리에 중복 게재할 수도 있습니다.
#서울회생법원 #법원공무원 #회생파산제도 #양계초 #정부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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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교육원 교수를 거쳐 현장에서 밥벌이 중입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고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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