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 시즌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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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살면서도 많은 전화가 오진 않았지만, 은퇴 후에는 하루에 두어 번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숨은 보험을 찾아준다거나 복권 번호를 알려준다는 시답지 않은 전화가 대부분. 언제나처럼 받을까 말까를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이번 전화는 초등학교 동기회 회장님의 연락이었다. 그가 손수 전화한 이유는 송년회 참석을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늙어가면서 가끔 만나 술이나 한잔하지, 뭐 하며 사느냐'는 얘기였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망설이다 생각해 보겠다며 간신히 전화를 끊었다. 참석한다는 말도, 참석하지 않는다는 말도 불편해서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말이 되었으니 각종 송년회에 망년회가 줄을 잇는다.
나는 연말이면 수도 없이 이어지는 망년회 내지는 송년회라고 하는 자리를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분위기를 따라 술을 마셔야 하고, 시답지 않은 소리를 들어줘야 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켜줘야 '역적' 취급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주춤해지긴 했지만, 노래방까지 가야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노동이 필요했다. 몸과 마음까지 피곤함을 느껴야 하는 연말 모임이 다가오니, 늙어가는 청춘은 이젠 감당하기 힘겹다.
송년회는 대체 왜 이래야 할까
파란병의 목이 비틀어지고, 갈색병 뚜껑이 퍽하고 소리를 지른다. 기어이 소주와 맥주가 섞여 한 덩어리가 되고, 숟가락을 컵에 찔러 넣어 한번 휘저어야 직성이 풀렸다. 건배사를 하려는 윗사람 호흡에 맞추기 위해 잔을 들고 기다렸다. 머뭇거림에 시간이 길어지고 술잔을 놓을까 말까 망설이다 기어이 버텨내야 했다. 훌륭한 건배사가 끝나면 입을 열고 털어 넣어야 좋아했고, 술잔이 오가면서 장내는 시끄러워졌다. 오래전, 연말 송년회의 모습이다.
지루하고도 고단한 저녁 술자리가 끝이 날 무렵, 내가 얼른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걸 눈치 챘는지 팔을 잡으며 2차를 가야 한단다. 걱정이 태산이다. 기어이 술에 취하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는 분위기였다. 망설이다 용기 내어 돌아서는 발걸음, 즐거워야 할 연말 술자리에 뒤통수가 뜨겁다. 왜 이런 자리가 되었을까? 내내 생각을 하며 내딛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러다 난데없는 세기의 역병이 찾아왔다.
듣도 보도 못한 코로나라는 역병이 찾아와 세상이 후들거렸다.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재편되고 있었다. 가능하면 술자리를 피해야 했고 어울림은 줄여야 했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외국 여행의 기억이다. 북유럽을 여행할 때 저녁 시간엔 빵 하나를 살 가게가 없었다.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고 어두컴컴한 시내는 고요하기만 했다. 모든 삶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세기적인 역병이 찾아오면서 삶의 모양도 많이 변했고, 오래전 북유럽에서 만난 그들의 삶을 되새기게 되었다.
모임을 줄이고 술자리를 줄였다
40여 년 가까이 교직에서 근무했고 은퇴를 했다. 은퇴를 하면서 가능하면 모임을 정리하고, 나만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용한 전원으로 숨어들었다. 술자리도 줄어들었고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하는 2차 내지는 3차라는 말을 잊고 지낸 지 오래다. 가끔 술자리가 그립기도 하고 해보고도 싶지만, 기꺼이 대부분의 모임을 정리하고 필요한 몇 개의 모임만 참여하고 있다. 필요한 모임이라는 것이 별건가.
전원에서 하루를 온전히 살아 낼 수는 없었다. 가끔 밖의 세상을 구경해야 했고 더불어 취미생활을 해야만 했다. 여기에 따른 모임이 있고 송년회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매주 산에 오르는 모임이 있고, 요일별로 자전거를 타는 친구들이 있다. 노년의 즐거움인 색소폰 동호회가 있으며, 수채화 동호회도 떨쳐낼 수 없다. 배낭을 메고 세계를 휘저으며 살아온 평생 친구들인 배낭여행팀이 있다. 온전히 지금을 살아내기 위한 모임들만 남아 있는 것이다. 연말이 오고 있으니 송년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연말 송년회는 간단한 점심으로 대신하고, 식사 후 카페에 앉아 삶의 이야기나 나누자 했다. 세월 따라 늙어가는 청춘들은 여기저기서 손을 든다. 회장님이 선택한 장소는 호젓한 호수가 보이는 보리밥집이다. 푸짐한 찌개가 곁들여지고 술병이 들어서야 어울리던 송년회가 보리밥이 주 메뉴인 점심상으로 대체됐다. 술이라면 거절할 줄 모르던 청춘들은 막걸리 몇 잔으로 모든 것을 대신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송년회를 마무리하면서, 내년 계획만 설명하는 자리로 1년을 마무리했다. 야, 이런 송년회도 괜찮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