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서 이항로 선생이 제자 최익현에게 준 글 '存心明理(존심명리)'
최창규
면암은 집안 사정으로 1847년(15세) 12월에 잠시 화서의 문하를 물러나왔다.
최기남(崔奇男)이 날마다 책을 외어 한 글자도 착오가 없었고, 또 손수 써서 높이 걸어 두고 완염(琬琰)처럼 보배롭게 여기고 고량진미처럼 즐기니, 이미 대의를 깨닫지 아니 하였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도암(陶菴) 이재(李縡) 선생이 외고 초록하여 후생을 권면하던 고심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기남이 암송한 것은 격몽요결·대학·논어까지, 그리고 고금 사람의 문자가 몇 천 마디 말이었는데도 숙달함이 이와 같으니, 세월이 쌓이게 되면 기남의 머릿속은 장차 하나의 장서각이 될 것이다.
그의 나이를 물으니, 주자가 어버이 명을 받아 유초당(劉草堂)·유병산(劉屛山)·호적계(胡籍溪) 세 선생에게 종학(從學)하던 나이였으며, 그의 뜻을 살펴보니 매궤환주(買櫃還珠)가 부끄러운 일이고, 완물상지(玩物喪志)가 경계할 일임을 알았으니 경외할 따름인데, 어찌 귤송(橘頌)을 읊을 만한 정도뿐이겠는가. 만일 기송(記誦)을 능사로 삼고 만다면 총명의 누만 될 뿐이니 또한 무슨 승상할 것이 있겠는가. 기남이 어찌 이런 일을 할 사람이겠는가. (주석 1)
여기서 매궤환주는 안에 담긴 옥구슬의 가치는 알지 못하고 밖의 궤짝에만 현혹되는 어리석음을 의미하고, 완물상지는 실천궁행을 외면한 채 오로지 암송에만 힘씀으로써 본심을 상실하는 것을 말한다. 곧 화서는 이 경계문에서 면암의 뛰어난 총기와 근면을 칭송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 참된 학문의 이치를 깨달았음을 칭찬하는 동시에 실천적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더욱 힘쓰기를 독려하였던 것이다.
면암이 일생 동안 올곧은 선비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바탕은 어린 시절 스승의 이와 같은 훈계와 가르침이었다. 화서는 뒷날 다시 면암에게 학문을 궁구하는 목적과 자세에 대해 '마음을 보존하고 이치를 밝힌다'라는 뜻의 '존심명리(存心明理)' 네 자를 내려주었다. 이로 미루어 화서가 면암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주석 2)
주석
1> 박민영, <최익현>, 162쪽,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역사공간, 2012.
2> 앞의 책,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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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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