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이 월북한 이후, 가족들이 겪었던 고난

[다시 만날 그날까지 29화] 약산 김원봉 외조카 김태영 (1부)

등록 2024.07.09 10:02수정 2024.08.01 10:25
0
원고료로 응원
a 사진1 2022년 11월 미국에서 귀국한 약산 외조카 김태영 회장을 남원에서 만난 모습

사진1 2022년 11월 미국에서 귀국한 약산 외조카 김태영 회장을 남원에서 만난 모습 ⓒ 김영희

 
필자는 2022년 11월 약산의 외조카인 김태영 회장을 전라남도 남원에서 만나 면담하게 되었다. 회장은 예전에 몇 번 멀찌감치에서 뵌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직접 가까이에서 대면하게 되어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에 회장의 오래된 기억을 빌려 본인의 상흔과 약산의 주변 인물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김태영과 필자의 인연은

회장은 1957년 12월 8일(음력)생 69세다. 현재 처와 미국 LA에서 거주한다. 미국에서 거주한 지 40여 년이 되었다. 필자와의 첫 인연은 2014년 1월 4일 '중국 항일운동 투쟁지 답사 약산과 석정, 그리고 우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약산과 너무 닮아서 교사들이 소곤거렸다. 외조카인데 진짜 약산과 쏙 빼닮아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몇 차례 멀찌감치 뵌 적은 있지만 대면하고 대화해 본 적은 없다. 밀양에서 어머니 학봉 여사 장례식에서도 가볍게 목례 정도였다.

그런데 2021년 밀양 민간인 학살지 미전고개에서 현장 답사하던 중 미전고개가 약산의 네 명의 동생이 학살당한 장소인 걸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학봉 여사가 돌아가신 후였다. 학봉 여사 생전에 답사했더라면 자세한 사연과 증언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어렵사리 회장의 연락처를 받아서 카톡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회장은 막내 김학봉 여사의 차남이다.
 
a 사진2 1950년 기준 약산 김원봉 형제사 9남 2녀 중 11여 김학봉

사진2 1950년 기준 약산 김원봉 형제사 9남 2녀 중 11여 김학봉 ⓒ 김영희

a 사진3  (좌) 약산 외조카 김태영 (중) 약산 김원봉 (우) 친조카 김용건

사진3 (좌) 약산 외조카 김태영 (중) 약산 김원봉 (우) 친조카 김용건 ⓒ 김영희


- 회장님 외삼촌을 꼭! 닮았어요?
"하하하! 유전적으로 염색체가 닮은 것이지요. '아들이 외삼촌을 닮은 이유' 인터넷에 한번 검색해 보세요." (서로 웃음).

- 회장님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 선생 진주에서 오시느라 고생했어요. 내가 20년 전에 연극 관련 일로 진주에 간 적이 있어요. 진주지역은 온순하고 깨어있는 도시로 기억합니다. 횟집에서 장어구이도 먹고 왔어요."

- 회장님 언제,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1957년 12월 8일생(음력) 67세이고 밀양군 밀양읍 삼문동에서 태어났어요. 형제는 3남 2녀지요."

- 약산 외삼촌의 사연은 언제부터 아셨어요?
"어릴 때 어머니가 하도 많이 약산 이야기를 해서 저절로 들었어요.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사춘기 중학교 때부터였어요."


- 유년기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한숨을 쉬시곤) 내 어릴 적 기억은 외할머니의 절절한 사랑과 비극뿐입니다. 그땐 배가 많이 고팠을 때였지만,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내가 8살까지 외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고 지금도 외할머니 머리카락 냄새까지 생각이 납니다. 그 후 고아원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고아원 생활은 혹독했어요. 학대도 많이 당했고, 특히 눈이 오는 날 발가벗겨서 밖에 내보내고 몸에 물을 뿌렸어요. 그리고 리어카에 흙을 싣고 나르기도 헸어요. 고아원 6년간 생활하면서 탈출을 3년 넘게 했어요. 어느 날은 탈출하여 길을 잃어버려서 파출소에서 데려다주어 집에 왔는데 봉창에서 동생이 형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들어간 적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추위를 싫어하고 미국에서도 겨울에는 아들이 살고 있는 따뜻한 하와이서 지내고 그래요. 추위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주 심합니다."

- 봉철 외삼촌의 구속으로 집안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제가 세 살 때니까, 어머니한테 들은 것은 1960년 6월 18일 봉철 외삼촌이 구속되자 외숙모가 전답과 시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까지 몽땅 팔아서 안동(친정)으로 이사를 가버렸어요. 그러니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형제 셋이 난전에 남게 되었어요. 그러니 생활이 어떠했겠어요. 너무 비참했어요."


- 그 고난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당시 내가 7살이고 동생은 3살, 외할머니 살아 계실 때는 보리죽이라도 얻으러 다니면서 살았어요. 때론 보리죽 얻으러 가는 것이 부끄러워서 서로 '니가! 가라 네가 가라' 하면서 서로 티격태격했던 기억이 나요. 보리죽 많이 먹고 살았어요. 봉철 외삼촌이 감옥(1960년대) 간 후 고아원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내가 6년 정도 형은 7년 동생은 9년 정도 고아원 생활을 했어요. 참 그 시절 생각하면 피눈물이 납니다.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 청년기 생활은?
"외할머니 돌아가실 때(1964년) 유언으로 딸(학봉)에게 '태영이를 잘 키워라!' 하시고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 후 8살 1학년 때 고아원 생활을 시작해 6학년 때 나오게 됩니다. 고아원 생활을 마치고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 계부가 가족을 버리고 가버렸어요. 고등학교 때는 부산에서 자취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녔어요. 졸업 후 군대(22살) 가기 전까지 밀양 문화원에서 살았어요. 문화원에서 연극, 미술 등 활동하다가 군대 갔어요."

- 아내는 어디서 만났습니까?
"아내는 밀양에서 연극 할 때 만났어요. 아내는 창녕 사람인데 할머니 슬하에 살았어요. 서로 외로운 사람들끼리 만난 것이지요. 그런데 덜컥 임신이 되어버렸어요. 처가집에서 장인이 결혼을 반대했어요. 그런데 2개월 후 애기가 태어났어요. 그때 아내가 집에서 피아노 2대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유학비자를 수소문해주었어요. 현재 자녀는 아들(김호성) 한 명이고 하와이에서 치과의사 합니다."
 
a 사진4 1987년도 미국으로 돌아온 아들 호성과 함께한 모습

사진4 1987년도 미국으로 돌아온 아들 호성과 함께한 모습 ⓒ 김영희

 
- 미국행을 결심한 계기는?
"평소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학비가 비싸서 공부를 못했기에 유학비자를 신청하여 아들과 아내는 한국에 두고 나만 먼저 미국 LA로 향했어요. 3년 후 애기와 아내가 미국으로 들어왔어요. 미국 생활은 만만치 않았어요. 닥치는 대로 안 한 일이 없습니다. 주유소와 극장 청소부터 시작하여 열심히 생활한 결과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경영학 공부했어요. 고된 미국 생활하면서 외롭고 힘들 땐 외할머니 생각을 많이 했고, 보고 싶고 그리웠어요. LA 생활 15년 만에 패션사업에 도전했지만, 고전을 많이 했어요. 그러나 그 결실은 헛되지 않았어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백화점 입점(의류 품목)에 성공했어요."

- 회장님은 어떤 성향의 인물이십니까?
"예술 감각이 뛰어나 특히 미술과 연극에 소질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인문학적 재능도 있어 시나리오도 쓰고 있고 뭐 그러다 보니까 하하하 성격은 솔직하고 담백하며 성실한 편입니다. 가령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과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이러한 성향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는지도 모르지요. 하하하. 그래서 어머니가 저를 두려워했어요."

회장님은 외관상으로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분으로 느껴지며 외유내강 모습과 내면의 성향도 약산의 성품과도 많이 닮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a 사진5 김태영 26세 시절에 쓴 빛바랜 원고지

사진5 김태영 26세 시절에 쓴 빛바랜 원고지 ⓒ 김영희

 
- 요즘 무슨 주제의 시나리오를 쓰고 계십니까?
"예전에는 내가 8살이 될 때까지의 스토리도 쓰고, 희곡도 쓰고 했어요. 이번 시나리오 주제는 한국의 강한 유교적 사고가 불러온 비극의 역사입니다. 시나리오는 '약산과 의열단, 그리고 의용대'의 스토리로 일반적인 시각과 좀 다른 시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 기대됩니다. 너무 멋지십니다. 회장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사실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 고아원에 보낼 정도로 고생시킨 분이라 아주 싫었어요. 어느 해 철영 형이 미국 왔을 때 친가 사연을 얘기해줘서 알았어요. 큰아버지가 계신 것도 그때 알았어요. 아버지 형제는 2남 6녀였어요. 친가 쪽도 좌익활동을 한 집안이었어요. 아버지는 약산을 따라서 좌익활동을 많이 했대요. 아버지가 쫓기는 신세였는데 도망치다가 쇠스랑에 찔린 적도 있었다고 해요. 두 번째 탈출 때는 아버지가 도망을 친 후 경찰이 큰아버지를 아버지로 착각하여 큰아버지가 산에 끌려가서 학살 당했어요. 외삼촌들 끌려가신 곳에 함께 학살당했어요.

친가는 아버지 때문에 큰아버지도 학살당했고 큰아들을 잃었기에 할머니는 저희들을 무척 싫어했어요. 큰집 재산은 큰고모한테 넘어갔다는 것을 동네 사람들한테 들었어요. 제가 미국에서 40년간 생활하면서 매주 성당에서 기도할 때 가족 성함을 써서 올리는데 아버지 김한근은 날 고생시킨 사람으로 인식되어 명단을 올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처가 꼭 올렸어요. 철영 형은 대학교를 보내주었지만, 나는 대학도 못 가고 질투가 나기도 했어요. 그래도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큰조카 공부도 시켰어요. 아버지는 제가 5살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희 형제 세 명은 태어났을 때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a 사진6   약산 가족사진 중 가운데 치마 저고리 입고 있는 어린 소녀 김학봉 여사 모습

사진6 약산 가족사진 중 가운데 치마 저고리 입고 있는 어린 소녀 김학봉 여사 모습 ⓒ 김영희


- 약산은 어머니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어머니는 막내라 약산이 월북한 후 네 오빠가 학살당하고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했어요. 위 사진 가족사진은 밀양 부북면 감천리 57번지, 사진 속 인물은 어머니 어릴 적에 집안 친척, 학봉, 구봉, 덕봉, 봉기, 의열단 단원과 촬영한 것입니다. 약산이 중국에서 의열단 활동하면서 식구들 보고 싶다고 사진이라도 찍어오라고 하셨다고 해요. 이 집이 제 어릴 때 있었어요. 이 집을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니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다른 모습으로 변해서 사지 않았어요. 약산이 박차정 외숙모 묘지를 그 집을 바라볼 수 있는 방향에 정했어요.

어머니가 경남여고 3학년 때 일입니다. 1947년 6월경 약산이 미군정 수배로 피신 다닐 무렵 당시 그 상황을 모르던 어머니는 약산을 만나기 위해 서울 수포고 근처 약산의 아지트로 갔다가 경찰에 붙잡혀 종로경찰서에서 고문당했던 사건도 있었어요. 약산 큰오빠는 1948년 월북하고 1950년 큰오빠 넷은 학살당했고 그나마 의지하던 봉철 오빠마저 구속된 후 2년 남짓 후에 외할머니까지 돌아가십니다. 어머니는 혈혈단신으로 세 자식과 남게 되어 막막한 현실을 맞게 됩니다."

- 외할머니는 평생 손자 손녀들만 키우셨습니까?
"우리 외할머니는 큰아들 약산은 월북했고 생때같은 자식을 네 명이나 잃었고 그나마 의지하던 봉철 아들마저 구속되는 처절한 삶 속에 먼저 떠난 자식의 손자들을 돌볼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 형제 세 명과 구봉 외삼촌 아들 용건 형 그리고 봉철 외삼촌 7남매 아이들을 매일 같이 돌봐주셨으니 손자 손녀 돌보시다 한세월을 다 보내신 듯합니다. 외할머니의 새까맣게 타버린 한 많은 삶은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세의 참혹한 삶에서 연을 끊고 저세상으로 훨훨 날아가서 먼저 간 외삼촌들을 만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어머니가 결혼 후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집도 절도 없는 상황에서 자식 셋을 키울 방법이 없어 자식들을 고아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대요. 마침 약산의 고모부인 황상규(주1) 아들 황만용(고종오빠)이 교육장으로 재직 중일 때 고종 오빠의 도움으로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와 중학교 교사로 근무할 수 있었어요. 어머니는 집이 없으니 학교 사택에 살면서 근무했어요. 약산이 월북한 이후 지속적으로 경찰에 잡혀가서 걸레를 코에 대는 등 모진 고문을 받아서 폐가 좋지 않았어요."
  
a 사진 김학봉 여사가 중학교 교사로 근무 시 학생들과 함께한 사진

사진 김학봉 여사가 중학교 교사로 근무 시 학생들과 함께한 사진 ⓒ 김영희


- 약산이 남긴 유품들이 있었습니까?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했기에 약산이 어머니께 유품을 남겼어요. 약산이 해방 후 환국할 무렵 장개석으로부터 받은 몇 점의 선물이 있었는데 약산의 월북 이후 그 선물과 편지와 사진 등을 모두 불태워 버렸어요. 장개석(주2) 선물 중 작은 병풍 형태의 선물은 지금까지 남아 있었으면 고가의 가치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만약에 그 유품을 보관해 두었다가 발각되면 큰 고초를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 사진은 어머니가 셋방을 전전긍긍하면서도 지켜낸 것입니다. 작은 장롱에 비단 보자기에 싸서 보관타가 가끔 내게 보여줬지요. 오빠들이 처형당하고 도망들 다니니 어머니는 항상 챙겨뒀지요.
  
a 사진8 (좌) 외할머니(천연이)외할아버지(김주익)(우)해방 후 환국한 약산는 표충사 주지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8 (좌) 외할머니(천연이)외할아버지(김주익)(우)해방 후 환국한 약산는 표충사 주지와 함께 찍은 사진 ⓒ 김영희

 
[각주]
(주1) 백민(白民) 황상규(黃尙奎, 1891-1931년) : 경남 밀양 출신. 상동면 고명학교 교사(1909), 밀양 동화중학 교사(1910-1911). 고명학교 교사 시절 『동국사감(東國史鑑』이라는 국사책을 저술, 독립과 애국정신을 함양시키는데 주력하였다. 1913년 대한광복단에 참여, 대구 악질부호 장승원을 사살하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주목받게 되자 1918년 만주의 길림으로 망명함. 그곳에서 유동열 김규식 김좌진 등과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재정 담당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였다. 1917년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정위원에 임명되어 군자금 18만 원이라는 거액을 모금한다. 창녕군 동양척식회사 소작료 1년분을 임시정부 자금으로 헌금하게 한 것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김원봉 곽재기 등과 1919년 의열단을 조직, 1920년 밀양 폭탄 사건에 가담해 검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 1927년 신간회 조직에 참여, 1929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31년 병환으로 별세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주2) 장개석(장제스)는 군사력으로 정권을 잡고 유지한 그의 이력에 비추어 통칭 총사령관으로 지칭된다. 중화인민 국민정부 시기의 제 2∙4대 국민정부 주석이자 현정 실시 이후 대만의 제1~5대 총통을 역임하였으며, 무려 46년 동안 집권하여 세계사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장기집권한 비군주 지도자로도 꼽힌다.


* 30회 김태영 편 2부가 계속됩니다.
 
a  작가 명함

작가 명함 ⓒ 김영희

덧붙이는 글 김영희(전 교사):한국전쟁기 창원유족회 유해발굴조사단장및 봉사자
#진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정선 한 카페 구석에서 발견한 먼지 쌓인 보물 정선 한 카페 구석에서 발견한 먼지 쌓인 보물
  2. 2 쓰레기 몰래 버리던 공간, 주인의 묘안이 놀랍다 쓰레기 몰래 버리던 공간, 주인의 묘안이 놀랍다
  3. 3 신입사원 첫 회식... 선배가 데려간 놀라운 장소 신입사원 첫 회식... 선배가 데려간 놀라운 장소
  4. 4 [단독] 구독자 최소 24만, 성착취물 온상 된 '나무위키' 커뮤니티 [단독] 구독자 최소 24만, 성착취물 온상 된 '나무위키' 커뮤니티
  5. 5 뉴욕 뒤집어놓은 한식... 그런데 그 식당은 왜 망했을까 뉴욕 뒤집어놓은 한식... 그런데 그 식당은 왜 망했을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