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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리에 '계복당'과 '뇌용정' 짓고 학문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 6] 선생의 명망은 극치를 이루었다.

등록 2024.08.12 13:42수정 2024.08.1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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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남명이 머물며 후학을 가르친 뇌룡정

남명이 머물며 후학을 가르친 뇌룡정 ⓒ 오문수

 
유생이 관직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업을 버리는 것과 같았다. 등과하여 관직에 나가는 일은 조선시대 양반계급의 생활의 코스였다. 남명은 스스로 그 길을 거부하는 길을 택하였다.

"흠칫 자신을 돌아보니, 부끄럽고 오그라들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배운 것이 형편없어 거의 일생을 그르칠 뻔한 것과, 애초에 인륜이니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본분 속에서 나오는 것인 줄 몰랐던 것에 대해서 깊이 탄식했다." (주석 1)

사람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보다 중요하다. 배운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고관대작이 되어 떵떵거리며 인간의 본성을 잃고 이욕에 빠져 더 큰 먹이감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명과 같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경과 의를 쫓아 바르게 살고자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26살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강직했던 분이었다. 고향의 선영에 장사지내고 3년간 여묘생활을 하면서 가난을 견디며, 주위의 민초들의 고초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여묘생활이 끝나자 30살에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김해의 탄동으로 이사했다. 신어산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 연구와 제자교육에 나섰다. 산해정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는 뜻으로 남명의 기상이 담겼다.
 
a  조식이 30년 동안(현지 안내판의 표현) 제자들을 가르쳤던 김해의 강학 장소에 제자들이 세운 산해정의 모습. 1609년에 완공된 산해정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식이 30년 동안(현지 안내판의 표현) 제자들을 가르쳤던 김해의 강학 장소에 제자들이 세운 산해정의 모습. 1609년에 완공된 산해정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 정만진

 
그는 산해정의 책상 머리에 다음과 같은 좌우명을 써붙여놓았다.

말은 항상 미덥게 행동은 항상 삼가며 사악한 마음을 막고 성심을 보전하라. 산처럼 우뚝하고 연못처럼 깊으며 봄날의 영화처럼 찬란하고 찬란하다.

김해에 이사하여 거기에 산해정을 짓고 안정된 공부에 들어가니 태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는 기상을 길렀고 한사존성(閑邪存誠), 악립연충(岳立淵沖)하는 학문과 인격을 닦았다. 여기에 성대곡·청향당·이황강·신송계 등 명류들이 모여들어 기묘사화 이후 소외당했던 사기를 응집, 재기를 도모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여기서는 자기학문과 인격을 도야하는 외에도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선생으로서는 진정한 학자의 기반을 다진 곳이기도 하다. (주석 2)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는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책을 읽고 학문을 익혔다.

그는 성리학 전공에 들어가기 이전의 20여 년 간 당시 사대부들이 일반적으로 받은 교육처럼 유학경전을 배웠고, 혼자서 읽고 터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자 노장(老莊)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철학이론을 섭렵하고, 사서(史書)를 비롯한 천문·지리·병마·경제 등 경세의 안목을 넓혔으며 또한 좌류문(左柳文) 등 문장사조(文章祠藻)를 좋아하여 자신의 창작능력을 길렀다. (주석 3)


이와 같은 학문의 넓이와 깊이가 있었기에 아무런 관직이 없는 처사인데도, "조선조 선비들 중에서 선비의 사명과 직능과 보람을 남명처럼 분명히 밝히고, 그를 위해 정진했으며, 용기 있게 조애(阻碍)를 물리치고, 그리하여 역사문화의 진정한 주체로 특립하여 보람을 누린 이는 없다." (주석 4)라는 평이 따랐다.

남명의 어머니 인천 이씨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의탁하는 아들이 벼슬 없이 처가에서 글 공부만 하고 있음에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집안의 장래가 걱정되었을 터다. 세상의 많은 어머니들처럼 영민한 아들이 출세하여 가문을 빛내고 아들 덕분으로 노후를 편히 보내고자 했을 것이다.

28살 되던 해 어머니의 성화로 다시 문과 향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러나 회시에는 낙방한다. 관직에 나가지 않기 위해 일부러 떨어졌을 지 모른다. 3년 후 어머니의 거듭되는 성화로 다시 무과 향시에 3등으로 합격했지만, 이번에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회시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이미 관료의 길을 걷지 않기로 결심한 그에게 과거 시험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후 다시는 어머니의 성화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포부를 이해하였다. 38살이 되는 1538년(중종 33)에 죽마고우이던 이언적과 이림의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그 무렵 제자들과 지리산을 탐사하고 신흥사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경상도 관찰사가 된 이언적이 만나기를 청했으나 신분이 서로 다르니 관직을 그만둔 후일에 만나도 늦지 않는다고 거절하였다.
 
a 산천재에 남명매 한가지가 아침햇살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산천재에 남명매 한가지가 아침햇살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산천재에 남명매 한가지가 아침햇살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산천재에 남명매 한가지가 아침햇살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 서재후

 
43살이던 1543년 남명은 가정적으로 큰 슬픔을 겪었다. 6월에 큰아들 차산이 요절하고, 이듬해 11월 어머니가 별세하여 아버지의 묘 동쪽에 안장하였다. 나라에서는 중종이 승하하였다.

남명은 48살 때에 18년간 글공부하며 학문의 기반을 닦던 김해를 떠나 포동으로 돌아왔다. 이곳에 닭이 알을 품는다는 의미의 계복당(鷄伏堂)과 연못처럼 고요했다가 때로 용의 꿈틀거림처럼 뇌성을 발한다는 뇌용정(雷龍亭)을 짓고 본격적인 학업과 제자양성을 시작했다. 당호의 명칭에서 산림처사로서 냉정하게 세상은 굽어보다가 강렬하게 국정을 비판하고 국책을 논하겠다는 결기가 배였다.

이 때 선생의 학문과 인격, 그리고 사상과 정신은 널리 알려져서 오덕계·정내암·노옥계 같은 기성학자들이 문하에 들어와 사림의 종사(宗師)로 추대되었으며, 특히 여기서 올린 이른바 단성소(丹城疏)가 조정을 놀라게 하고 사림을 종동케 하자 선생의 명망은 극치를 이루었다.

벽립천인(壁立千仞)이어, 태산교악이니, 추상열일이니, 부시일세(府視一世)니, 하여 선생의 선비로서의 기상을 사람들이 추앙하고 경도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뇌용정에 있던 시대다. 선생의 학덕이 더욱 익어가고 명망이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더욱 예우하고 벼슬을 내렸으니 모두 사퇴하여 선비의 고고한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주석 5)

주석
1> 앞의 책, 34~35쪽.
2> <행장 및 사적>, 363쪽.
3> 김충열, <남병학논총 제1집>, <남명학연구논총> 제1집, 6쪽, 남명학연구원, 1988.
4> 앞의 책, 23쪽.
5> <행장 및 사적>, 363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조식평전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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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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