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경찰서일제강점기 충주경찰서 <충주관찰지>
충주출판소
충주가 암흑천지가 돼서 잔뜩 긴장했던 경찰들이 사방에 불이 켜지자 경계의 눈초리를 더욱 빛냈다. 창이 총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기껏 몇 정 안 되는 총과 다수의 쇠창으로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충주경찰서에서 한참 떨어진 살미지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소수의 빨치산과 면소재지와 인근 마을에서 동원된 마을 주민들이 지서를 에워쌌다. 총과 창으로 무장한 빨치산과는 달리 마을 주민들은 양 주머니에 볼록하게 집어넣은 돌맹이가 무장의 전부였다(국사편찬위원회, '6.25를 전후한 월악산 지역의 소요', 2008).
지서를 에워싼 이들이 돌맹이를 던져 보기도 전에 충주경찰서에서 출동한 무장병력이 도착했다. 결국 GMC 트럭 불빛이 지서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빨치산들은 긴급히 후퇴해야 했다. 충주경찰서장 이원경(1948.9.25.~1949.8.5.)이 종일 넋이 나간 이 날은 1948년 10월 7일이었다.
빨치산과 토벌대
월악산 빨치산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48년 이전에 구성됐다. 1946년 말과 1947년 초의 일이다. 한수면 송계리에서는 1947년도에 마을 청년 25명이 월악산에 입산했다고 한다. 즉 서북청년회가 송계리에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월악산 빨치산이 본격적인 활동을 한 시점은 1948년도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부터이다. 이들의 활동은 1956년까지 지속됐다. 이들은 인민군이 충주·제천을 점령하던 1950년 여름과 가을의 세 달간만 합법적인 신분이었다. 나머지 기간은 불안한 신분이었다. 집요한 군경토벌대의 공격에 몸을 피하기 바빴다.
이런 와중에도 월악산 빨치산은 충주·제천·단양 등 충북의 북부지역에서 유격대 활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청풍·금산의 빨치산과 경북의 산악지대에서 북상하는 빨치산들과 함께 단양 역전파출소를 습격(1949.6.10.)했다. 또한 죽령터널 습격(1949.8.16.), 단양경찰서 습격(1950.7.12.), 충주군청 습격(1952.11.3.)을 강행했다.
이에 맞서 군경토벌대가 구성됐고, 마을 단위에서는 대한청년단을 위시로 해 자위대가 구성됐다. 결국 한수면 송계리의 경우처럼 같은 마을 사람들이 한 편에서는 빨치산, 다른 한 편에서는 토벌대로 나뉘어 총을 겨누게 됐다.
시기가 불분명하지만 한국전쟁 전에 살미면 무릉리에서도 참변이 일어났다. 빨치산에 의해 두 명의 주민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중 김진갑은 자신의 문제(?)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동생 김순갑이 대한청년단 살미면 단장이라는 이유로 쇠망치로 가격당해 죽임을 당했다. 마침 동생이 집에 없어서 대신 죽임을 당했다. 그의 집은 불타버렸다.
같은날 죽임을 당한 이는 윤숙일로 독립촉성국민회 살미면 청년대장을 역임한 이다. 2008년도 국사편찬위원회가 지역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구술수집에서 한 증언자는 "윤숙일이 이전에 좌익들을 붙잡아다 구타를 해서 빨치산이 보복한 것"이라고 했다. 빨치산과 토벌대·자위대는 한 치 양보 없는 작은 전쟁을 치렀다.
소고기 잔치
"울 아들은 왜 안 온 겨?"
"걱정 마시래요. 남하해서 조국해방전쟁의 최선봉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또출이(가명)의 이야기를 들은 박무용(가명)의 가슴은 옥죄었다. 아들이 자랑스럽기보다는 언제 죽을지 몰라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안하거나 서운한 표정을 산에서 내려온 이들에게 내비칠 수는 없었다.
1950년 7월 한수면 송계리에서는 난데없는 소고기 잔치가 벌어졌다. 그동안 월악산 동굴과 비트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이 인민군의 남하로 송계리에 당당히 입성한 것이다.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된 송계국민학교 운동장에 솥이 내걸렸다. 여성동맹원들은 부잣집에서 강제로 끌고 온 소를 삶았다. 특히 월악산에 입산했던 집안 여성들의 몸이 분주했다. 소고기 나르랴, 하산한 이들에게 자기 가족의 안부를 물으랴.
저녁 때마다 마을 주민과 꼬맹이들이 송계국민학교 교실에 동원돼 '김일성 장군의 노래' 등을 배웠다. 철없는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노래를 배운다는 사실 자체가 신났다.
그런데 분위기가 싸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루는 경북 문경에서 잡혀 온 군인이 완장 찬 이들의 노리개가 됐다. 학교 운동장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가운데에 나무를 세웠다. 국군 패잔병이 나무 기둥에 묶여 세워졌다.
"반동 간나 새끼, 노래 일발 장전!" 나무 기둥에 묶인 청년은 억지춘향격으로 울상을 지으며 노래를 했다. 완장 찬 이들이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노리개가 된 청년의 운명은 다음날 나락으로 떨어졌다. 완장 찬 이들이 팥죽거리에서 아식보 장총에 대검을 꽃아 청년의 가슴을 내질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