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시절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된 송계국민학교 터.
박만순
홍승섭·홍재모 부자가 송계국민학교로 끌려간 것은 1950년 9월 초였다. 며칠 전 석수천이 청주의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되는 모습을 구경했다는 이유였다.
송계리 이장이었던 석수천은 제헌의회 선거 때 목숨을 걸고 투표함을 지켰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지서장으로 특채됐었다. 이런 그가 한국전쟁 직후 문경으로 도피했다가 붙잡혀 오는데 구경한 것이 석수천을 동정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던 송계국민학교로 끌려간 홍재섭·홍재모 부자는 모진 수모를 당했다. 완장 찬 이들의 가족에 의해서였다. 이 사건이 발발한 지 한 달쯤 지나서였다. 이번에는 세상이 180도 달라졌다.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대한민국 군경이 제천과 한수면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인민위원회 시절 감투 쓴 이들은 다시 월악산에 입산했다. 그중 리더격 이었던 이들은 3.8선을 넘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세상이 조만간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월악산 동굴에 은신했다. 문제는 완장 찬 이들의 가족이었다. 마을에는 여성과 노인, 아이들뿐이었다.
송계국민학교로 송아무개의 어머니가 뒷결박을 당한 채 끌려왔다. 빨치산 중대장의 어머니이자 동학대접주 성두환의 며느리였다. 그녀의 죄는 빨치산 중대장의 어머니라는 이유뿐이었다. 나머지 10여 명도 비슷한 이유였다.
이들은 송계국민학교 옆 강가에서 경찰에 의해 공개 처형됐다. 시신들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실려 가는 것을 당시 소년 홍택주(1936년생)는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숯검댕이 칠한 여성들
"아가, 가만 있어 봐라"라며 미주(가명) 어머니는 딸의 얼굴에 숯검댕이를 칠했다. 곱던 딸의 얼굴이 며칠은 굶주린 걸인의 모습이 됐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어머니는 남편에게 눈빛을 건넸다.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미주 아버지는 딸에게 말했다.
"야야. 쫌 답답하더라도 낮에는 여기 들어가 있어라." 아버지가 딸에게 들어가 있으라고 한 곳은 김치독이었다. 국군 제8사단이 보무도 당당하게 한수면에 입성한 1950년 가을이었다.
그해 가을 송계리 5명의 여성이 군인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 군인들은 예쁜 여성만 보면 가만 두지 않았다. 그러자 딸을 둔 송계리 사람들은 딸의 고운 얼굴에 숯검댕이를 칠하고 김치독에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일은 송계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인근 충주 살미면과 엄정면, 제천 수한면 등지에서도 숱하게 일어났다.
이듬해 봄에는 또 한 차례의 홍역이 송계리 주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경토벌대가 월악산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소개령을 내렸다. 군사작전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로 피난 가라고 한 것이었다. 새롭게 이주하는 곳에 그들이 발 뻗고 누울 공간을 준비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더군다나 소개령에 의해 사람들이 떠난 송계리는 다음날 불바다가 됐다. 군인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불을 지른 것이다. 1951년 봄 월악산 인근지역 산간 마을은 초가집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른바 군인들의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송계리를 불바다로 만든 것은 견벽청야 작전이 아닌 그저 '싹쓸이 작전'에 불과했다.
사람의 목숨과 재산의 존엄성
충북 충주군 살미면 무릉리 최문용 집안은 5000석 지기로 근방에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그런 이유로 최문용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가 해방 후 서울에서 활동할 때 살던 집은 대궐 같았다고 한다. 고향에 있는 그의 집은 빨갱이의 집이라고 해, 독립촉성국민회의 청년대가 와서 때려부쉈다.
그런데 무릉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수면 북로리 이구영 집의 상황은 달랐다. 독립촉성국민회 청년대가 몰려와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차마 집을 불태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구영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와 숙부 때문이었다.
이구영의 아버지 이주승과 숙부 이조승은 구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한 이였다. 비록 이주승이 1947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집안은 해방과 한국전쟁 시기에 제천에서 애국자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좌·우 갈등이 치열했던 시기라 하지만 우익 돌격대도 차마 그의 집을 해코지할 수는 없었다.
의병운동을 한 집안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과 재산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풍토가 제천 한수면과 대한민국 곳곳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역사적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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