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토시 어릴 적의 토시 모습을 닮은 앞집 길냥이
김나라
몇 주 전 내가 다니는 상담센터에서 사이코드라마를 했다. 사이코드라마는 연극적인 기법을 활용한 집단 심리치료인데, 나는 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참여해 왔다. 이날은 내가 주인공을 맡아 토시에 얽힌 마음을 풀어내게 되었다. 토시와 함께 산 시간보다 떠난 후의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내 안에는 그리움만큼 커다란 미안함과 죄책감이 엉켜 있었다.
토시에게 금지한 것들, 눈치채지 못한 것들을 후회하는 나에게 동거인은 말했었다. 좋았던 것들만 얘기하고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러자고 대답했는데, 그 말의 반만 지킬 수 있었다. 좋았던 것들만 얘기하기는 쉬웠지만 좋았던 것들만 기억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선생님이 말했다. 벽을 보고 서서 토시에게 미안하다고 크게 외쳐 봅시다. 그런데 그간 사이코드라마를 하면서 아버지에게도, 엄마에게도, 성추행 가해자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잘했던 내가 그때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조용히 혼잣말로 해보라고 말한 뒤에는 한참 후에 작은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미안해. 그리고 용기를 내어 하얀 천을 덮어쓴 토시(토시 역할을 하는 참가자)에게 다가갔다. 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토시,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너무 보고 싶어. 몇 번이나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 손으로 강의실 문을 열고 토시를 떠나보냈다.
사이코드라마를 하면서 새삼 떠올랐다. 내가 토시를 웃긴 고양이로 여기면서도 존경했던, 지금도 존경하는 이유는 토시가 큰 그릇을 가진 고양이였기 때문이란 걸. 토시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 중 가장 큰 것은 용서할 줄 아는 마음이었다. 맞아. 미워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마음에 미움 없이 사랑만 채우는 토시를 보면, 우주가 들어있는 토시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토시를 묘보살이 된 뒤에도 나를 원망하고 있는 옹졸한 고양이로 생각하는 건 내 오산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 퇴근길 친구가 토시라면, 미운 정이 든 나를 보고 싶어서 왔을 것이다. 아니면 꿈에서 토시의 부탁을 받고, 거 참 귀찮아 죽겠네, 하면서 나를 집까지 수행해 주는 동네 츤데레 고양이일 거다. 이 집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려고 말이다.
모든 관계는 흐른다
내 수행원이 이만하면 토시 부탁을 충분히 들어줬다고 생각했는지, 여름이 되고부터는 통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올여름은 못 보던 냥이 가족이 앞집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인절미 엄마, 카오스 아빠, 고등어와 삼색이와 까망이 새끼들. 애옹거리는 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면 다섯 식구가 서로 부르며 지붕에서 지붕으로 오가고 있었다.

▲앞집 길냥이 가족 애옹거리는 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면 서로 부르며 지붕 위를 오가고 있었다. 한여름 몇 주간 앞집에 머물다 떠났다.
김나라
어떤 날은 새끼 셋이 붙어 웅크리고 엄마 젖을 먹고 있었다. 젖을 빨 때마다 맞춰서 연습이라도 한 듯 여섯 개의 귀가 나비처럼 팔락거렸다. 또 어떤 날 나는 기분이 상한 채 집에 들어오다가, 고등어 무늬 새끼가 지붕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낮잠을 자는 모습에 위안을 받았다.
사진으로 본 토시의 어릴 적 모습을 꼭 닮은 아이. 며칠 사이 독립을 한 건지 혼자 다니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다섯 식구 모두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존재는 늘 다음 자리를 찾아 떠나고, 모든 관계는 흐른다. 잠시나마 머물러준 토시들에게 감사한다. 공허한 귀갓길을 웃음과 놀라움으로 채워준 토시, 불볕을 피해 한여름을 방안에서 보내는 내게 창문만 열면 만날 수 있는 행복을 선사한 다섯 토시, 그리고 항상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마음속 토시.
나에게 찾아와 주었던 존재와 나눈 마음과 배움. 그 힘으로 살아가는 일. 없을 수도 있었던 인연에 감사하는 일. 그건 남은 자만의 기쁨이다.
아직 내게 머물러 있는 인연들을 생각한다. 언젠가는 다음 자리로 떠나게 될 사람들. 사랑은 미움을 포함하는 마음이라지만, 함께하는 동안 미워하는 시간보다 순수하게 사랑하는 시간이 더 많으면 좋겠다.
나의 묘보살 님께 약속하고 싶다. 당신이 나를 몇 번이고 용서해줬던 만큼, 나도 용서를 아는 사람이 될게요. 바람처럼 가볍게, 비워낼 줄 아는 사람이 될게요. 스스로 괴롭히지 않을게요. 그는 우주가 다 들어있는 멍하고 아리송한 눈으로 나를 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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