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 11월 10일자 26면에 실린 '지식인의 진짜 책무'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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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화제가 된 한 칼럼만 봐도 그렇다. 김민식 문화방송 피디는 지난 10일 <한겨레>에 '지식인의 책무'란 글을 게재하면서 부모님의 일화를 가져다 썼다. 어릴 적 어머니를 때렸던 아버지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그는 책을 전혀 안 읽는 사람과 너무 많이 읽는 사람이 같이 살면 너무 많이 읽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며, 아마도 책을 너무 많이 읽은 어머니가 사사건건 문제 제기를 하다보니 그것이 아버지의 열등감을 건드렸고, 그로 인해 둘의 사이가 더욱 나빠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면서 지식인은 지적 우월감을 느끼며 상대를 계도의 대상으로 보는 대신 존중하는 것이 먼저라고 마무리한다.
이 칼럼은 결국 가정폭력을 옹호한다는 가열찬 비판 끝에 본문이 삭제되고, 그 대신 필자와 해당 신문사의 사과문이 게재되는 유례 없는 결말을 맞이했다. 칼럼이 삭제된 이후에도 비판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는데,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조금 지나친 처사라고, 비록 가정폭력이라는 잘못된 예시를 끌어오긴 했으나 본문의 주제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라며, 그럼에도 가정폭력을 소재로 들었다는 이유로 비판을 지속하는 것은 달이 아닌 손가락을 보는 행위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나 역시 작성자가 어떤 악의를 가지고 해당 칼럼을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정말 말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그런 사례를 가져다 썼을 것이다. 진짜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지식인이 가져야 마땅한 겸손한 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해당 칼럼을 옹호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적은 내용이라 더욱 문제가 된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각의 발현이다. 이번 건은 쓴 이가 평소 책을 읽는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저도 모르게 표출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 여성은 까다로운 여성, 문제를 보면 넘어가지 못하고 매번 지적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여성, 남성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이란 인식이 그의 마음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어머니는 "지나치게 많은 책을 읽어 불행해졌다"는 통탄과 아쉬움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결국은 공부하는 여성, 글을 읽고 쓰고 생각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여성에 대한 생각이 나혜석과 케이트 쇼팽이 살던 시절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그 글을 쓴 이 혼자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해당 칼럼은 하나의 사례일 뿐, 그러한 인식은 비단 그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겨레>에는 코로나 발생 이후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 밑에는 여성들이 교육을 너무 많이 받아서, 페미니즘에 노출되고 예전에 비해 공부와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 불행해졌다는 댓글이 수백 개가 넘게 달렸다. 주로 남성들이 남긴 것이었는데, 그들은 여성들이 성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이전 대비 '작은' 차별을 그냥 넘기지 못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역시나 김민식 피디가 쓴 칼럼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이다. 여성이 너무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그로 인해 불행해졌다는, "잘난 여성은 불행한 여성"이라는 메시지의 반복. 하지만 잘난 여성, 공부하는 여성, 책을 읽는 여성이 불행한 이유가 과연 그가 지나치게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
혹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돌을 던졌던 주변 사람들 때문은 아니었을까? 잘난 척한다는, 고상한 척한다는, 각종 문제점에 대해 참고 넘어가지 않고 매사 이의를 제기한다고 비난했던 사람들 때문은 아니었을까?
물론 한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는 데는 수백 수천 가지 복잡한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쉽게 단정 지어서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다. 다만 적어도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잘난 남성은 불행한 남성"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책을 읽는 남성"에게는 돌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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