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2 07:09최종 업데이트 23.08.22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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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호 좌회전이 가능한 어린이 보호구역의 모습. 제한속도를 30km/h로 제한하고 과속단속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 이봉렬

 
가족을 만나러 잠시 한국에 들렀습니다. 평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만 이번에는 지방 도시를 몇 군데 돌아다녀야 하는 관계로 차를 빌려서 운전하며 다녔습니다. 직접 운전을 하다 보니 예전에 비해 도로에 어린이 보호구역이 많아진 걸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빠르게 달리다가 갑자기 속도를 늦춰야 하는 게 처음엔 잘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과속단속카메라가 지켜보고 있기도 하고, 어린이를 교통사고로부터 보호하는 건 어른으로서 당연한 일이기에 운전하는 데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노인보호구역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2008년부터 시행된 제도라고 하는데 외국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전 이번에 처음 봤습니다. 노인보호구역에도 어린이보호구역과 마찬가지로 노인 보호 표지판, 과속방지턱, 미끄럼 방지시설 등이 설치되어 차량의 속도를 줄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교통약자인 어린이와 노인을 위한 이런 시설이 있다는 건 모두가 안전한 세상을 위해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점은 어린이보호구역마다 설치되어 있는 과속단속카메라가 노인보호구역에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노인보호구역의 존재를 알고 나서 일부러 세 군데를 찾아 확인했는데 그중 한 군데에만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두 군데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어린이보호구역은 도로교통법에 따라 과속단속카메라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는데, 노인보호구역은 그렇지가 않아서 설치되지 않은 곳이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노인보호구역의 과속방지턱 가운데는 색깔만 칠해 놓고 실제로는 턱이 없는 가짜도 있었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단속장비... 고령의 보행자들이 위험하다
 

노인 보호구역의 모습. 과속방지턱은 실제 턱이 아니라 색칠만 해 놓은 상태고 과속단속카메라는 없습니다. 어린이 보호구역과 달리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봉렬

 
어린이들은 교통사고를 많이 당하고, 노인들은 그렇지 않아서 이런 차이가 있는 걸까 싶어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도로교통안전공단의 교통사고 보행 사상자 통계를 보면 2022년 기준 전체 보행사고 사망자 933명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이 558명으로 나머지 세대를 모두 더한 것보다도 많았습니다. 12세 이하의 어린이는 14명이었으니 40배 정도 더 많은 수치입니다.

지난해 말에 도로교통공단이 내놓은 <노인보호구역 안전시설 운영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어린이보호구역과 노인보호구역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 전국에 설치된 노인보호구역은 2673개소로 지정 대상 대비 지정률은 약 30.0%입니다. 이는 어린이보호구역과 비교했을 때(1만 6759개소 지정, 지정률 84.4%) 5분의 1도 안 되는 저조한 수준입니다. 노인보호구역 연장거리 총합계는 815.9km로 노인보호구역 1개소당 연장거리는 305m이고, 어린이보호구역 연장거리 총합계는 7153.2km, 보호구역 1개소당 연장거리는 427m로 노인보호구역의 약 1.4배 수준입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보행사고 사망자 수는 OECD국가 평균의 4배 가까운 독보적인 1위입니다. ⓒ 이봉렬

 
노인보호구역의 경우에는 왕복 2차로 이상 도로 구간이 포함된 조사대상지 47개소 중 무인 과속단속장비가 설치된 지점은 4개소에 불과해 열 곳 중 한 곳만 설치가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어린이보호구역과 비교하면 노인보호구역의 지정률, 지정 개소 수, 보호구역 연장거리, 과속단속장비 설치까지 모든 것이 미흡한 수준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도로교통공단이 2021년 내놓은 OECD회원국 교통사고 비교 결과를 보면 201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 10만명 당 보행사고 사망자 수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많았습니다. OECD 회원국의 평균은 2.5명인데 한국은 9.7명으로 독보적으로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노인보호구역, 이렇게나 달랐다
 

싱가포르의 실버존 (노인보호구역) 곧게 뻗었던 길을 꾸불꾸불하게 다시 만들었고 차 폭도 줄였습니다. 과속단속카메라가 없어도 차가 천천히 갈 수 밖에 없습니다. ⓒ 이봉렬

 
2주간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싱가포르로 돌아오자마자 싱가포르의 노인보호구역을 찾았습니다. 싱가포르의 노인보호구역은 실버존이라고 부르는데 한국보다 늦은 2014년부터 도입되었습니다. 지금까지 30개의 실버존이 만들어졌고 2025년까지 50개로 확대할 예정입니다.

집 근처 실버존에 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좁고 꼬불꼬불한 도로와 그 사이의 보행섬입니다. 기존 도로에 표지판과 과속방지턱 등을 설치한 게 아니라 기존에 직선으로 뻗어있고 왕복 4차선까지 가능했던 길을 뒤집어엎고 그 자리에 새로운 도로를 만들어 낸 겁니다. 길이 좁고 꼬불꼬불한 데다 50m 남짓한 간격을 두고 과속방지턱까지 있으니 자동차들은 자연스레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과속방지카메라는 없습니다. 싱가포르 하면 벌금부터 떠올리게 되지만 교통안전 관련해서는 단속을 통해 운전자에게 벌금을 매기는 게 아니라 원천적으로 과속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보행자가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실버존에 설치된 횡단보도 역시 세심한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일단 횡단보도는 자동차 도로가 아니라 인도와 높이를 맞췄습니다. 휠체어가 불편 없이 다닐 수 있도록 인도와 횡단보도의 턱을 없애면, 그 공간이 경사가 생겨서 노인들이 서 있을 때 불편할 수 있다고 해서 아예 인도와 횡단보도의 높이가 같습니다. 대신 자동차 입장에서는 횡단보도 자체가 과속방지턱이 되는 것입니다. 횡단보도 위에는 햇볕과 비를 막을 수 있는 지붕을 설치해서 보행 중 미끄러움을 방지하고 있습니다.

횡단보도에 있는 신호등에도 한가지 기능이 더해져 있습니다. 신호등 기둥에 '그린맨 플러스'라는 카드 리더기가 달려 있는데 여기에 노인과 장애인에게 발급되는 카드를 태그하면 보행신호가 최소 3초에서 13초까지 연장이 됩니다. 걷는 속도가 느린 노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겁니다. 거기에 길 중간에 보행섬이 넓게 있어서 가다가 신호가 바뀌더라도 안전한 곳에서 대기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실버존에 있는 횡단보도. 인도와 차도의 높이를 같게 만들었고 중간에 보행자섬이 있어서 경우에 따라 대기할 수도 있습니다. 횡단보도 위에는 햇볕과 비를 막을 수 있는 차단막을 설치해서 보행중 미끄러움을 방지하고 있습니다. ⓒ 이봉렬

  

횡단보도 신호등 기둥에 설치된 그린맨 플러스 카드 리더기. 여기에 노인이나 장애인이 카드를 대면 보행신호가 최소 3초에서 13초까지 더 길어집니다. ⓒ 이봉렬

 
<스트레이트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2022년 싱가포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노인 보행자 수는 23명입니다. 인구 차이를 감안해서 비교하더라도 한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실버 존만 따로 떼어 보면 노인 보행자에 대한 전체 사고가 80%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 정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지난 3월 싱가포르 육상교통국은 기존의 스쿨존과 실버존의 개념을 더욱 확대하여 보행자 안전을 우선시하는 "친근한 거리(Friendly Streets)"를 시범 도입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학교나 노인 시설 주변이 아니더라도 보행자가 많은 지역은 차량 진입을 줄이고 보행자와 자전거를 우선하는 도로로 바꾸겠다는 계획입니다. 친근한 거리로 지정된 곳은 자동차 도로를 줄이고 속도 제한을 강화하는 대신 인도를 넓히고 자전거 전용도로를 추가로 설치할 예정입니다. 

언제부턴가 한국의 여러 정치인들이 싱가포르를 배우겠다며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노인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독보적으로 많은 우리나라가 싱가포르로부터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게 있다면 싱가포르가 어떻게 노인들의 보행권을 지켜주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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