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09 07:09최종 업데이트 23.08.09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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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은 싱가포르 독립기념일(내셔널데이)입니다. 내셔널데이는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이 날이 되면 군사 퍼레이드, 공연, 에어쇼,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를 벌이며 싱가포르의 독립과 그 이후 성취해 낸 기적과 같은 고도성장을 자축합니다. 이런 행사를 위해 싱가포르는 3개월 전부터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동원한 리허설을 진행하며 분위기를 띄웁니다.

하지만 올해는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습니다. 독립 이후 줄곧 집권하고 있는 인민행동당에서 연이어 터진 스캔들로 여론이 싸늘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싱가포르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데 모든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승리하며 지금까지 한번의 변화 없이 집권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독립 이후 치른 4번의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이 모든 국회 의석을 차지하게 되자 의회에 야당 의원도 있어야 한다며 무선거구 의원 제도를 만들어 야당에 의석을 나눠줄 정도로 인민행동당의 위상은 확고합니다. 아니 확고했습니다. 최근의 스캔들이 터지기 이전까지는 말입니다.

[스캔들1] 장관들의 호화 방갈로
 

장관들의 방갈로 임대에 대한 부패행위조사국의 조사 결과를 보도하고 있는 싱가포르 스트레이트 타임즈 ⓒ 스트레이트 타임즈

 
싱가포르 법무부 장관인 샨무감과 외교부 장관인 비비안은 2018년부터 부인 명의로 정부 소유의 방갈로를 임대했습니다. 단독주택 형식의 해당 주택은 도심임에도 불구하고 넓은 녹지를 포함하고 있어 월 임대 금액이 둘 다 2만 달러(약 2천만원)가 넘었습니다.

야당은 법무부 장관이 직접 관리 감독하는 국토청(SLA)으로부터 해당 주택을 임대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특혜나 이해상충이 발생하지 않았는지 물었고, 정부는 부패행위조사국(CPIB)에 해당 거래를 조사하도록 맡겼습니다.


6월말 부패행위조사국은 두 장관의 해당 주택 임대 과정에서 어떠한 비리나 특혜가 없었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위법사항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하고 44페이지에 달하는 조사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합니다. 싱가포르는 지난 몇 해 동안 임대료와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서 사회 문제화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외국인이 싱가포르에서 부동산을 거래할 때 내는 세금을 60%로 올리는 등 집값을 잡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한번 올라 버린 집값은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고 이는 특히 독립을 준비하는 젊은 층의 불만을 사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장관들이 수천 평의 땅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좋게 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캔들2] 교통부 장관과 부동산 재벌의 체포
 

이스와란 싱가포르 교통부 장관이 F1을 싱가포르에 유치한 옹벵셍 회장과 함께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이번에 둘 다 체포 되었습니다. ⓒ 이스와란 페이스북 게시물

 
법무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과 관련된 스캔들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7월 중순, 이번에는 교통부 장관이 싱가포르 부패행위조사국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부패행위조사국은 웹사이트에 세 줄짜리 짧은 보도자료를 냈는데 교통부 장관이 조사를 받고 있으나 조사가 진행 중이므로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문단에서 "싱가포르는 부패에 대해 엄격한 무관용 정책을 채택하고 있"으며, "부패 활동에 연루된 모든 당사자에 대해 조치를 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교통부 장관에게 부패 혐의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냈습니다.

교통부 장관과 함께 체포된 기업가 옹벵셍은 말레이시아 출신의 부동산 재벌로 그가 세운 HPL은 포시즌스, 하드락호텔, 메리어트 등과 같은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자동차 경주 대회인 F1을 싱가포르에 유치한 거물입니다. 1996년 당시 리콴유 총리와 당시 부총리였던 그의 아들 리센룽 총리가 HPL이 개발한 고급 콘도미니엄 4채를 구입할 때 "원치 않은 할인"을 받은 일로 논란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조사에서 무혐의로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이번에 체포된 두 명 모두 싱가포르의 정계와 재계에 워낙 거물인지라 어떤 부패 행위가 있을 지 초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스캔들3] 국회의장의 막말과 불륜
 

싱가포르 국회의장과 여당 의원이 불륜 관계가 드러나 동반 사퇴 했습니다. ⓒ 스트레이트 타임즈 보도 화면

 
국회의장 탄 추안 진이 지난 4월 의회에서 야당의원의 연설에 대해 막말을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야당의원이 싱가포르 정부가 저소득층을 돕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라는 연설을 했는데 국회의장이 "빌어먹을 포퓰리스트"라고 혼잣말을 한 것이 녹음이 되어 동영상으로 공개된 것입니다.

국회의장은 뒤늦게 해당 의원에게 공개사과를 했으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해당 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탄 추안 진 국회의장이 여당 여성의원과 수년간 불륜관계였다는 게 밝혀졌고 결국 둘 다 사임하는 싱가포르 정치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문제는 이 둘의 불륜관계를 리센룽 총리가 지난 2월에 이미 알고 있었고, 국회의장 사임까지 논의가 되었으나 지역구 의석 처리 문제로 인해 지금까지 미뤄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총리가 국가보다 정당을 우선하는 판단을 내렸다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의 도발, 뒤로 가는 싱가포르?

잇달아 터진 국회의장과 장관들의 스캔들로 인해 곤경에 빠진 싱가포르 정부를 두고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니스트>가 불을 지르는 기사를 썼습니다. "일련의 스캔들로 인해 싱가포르 정부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는 수장이 총리의 임명을 받고 수사에 대해 총리에게 보고를 하는 부패행위조사국은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으며 장관들에 대한 수사결과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일련의 스캔들로 인해 싱가포르 정부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제목의 <이코노미스트> 기사. 부패행위조사국의 독립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 이코노미스트 보도 화면

 
해당 기사에 싱가포르 정부는 발끈했습니다. 영국 주재 싱가포르 고등판무관은 <이코노미스트>에 서한을 보내서 기사 내용에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장관에 대한 수사이기 때문에 총리에게 동의를 구하기는 했지만 수사에 허가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겁니다. 부패행위조사국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수장에 대한 임명 또는 해임에 대한 보호 장치도 있다는 것이 싱가포르의 설명입니다.

기사에 대한 해명만으로 싱가포르 정부의 분이 풀리지 않았던 걸까요? 영국의 경찰청장 역시 내무부 장관의 임명을 받는데 그것 역시 독립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냐고 되물으며,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CPI) 순위를 보면 싱가포르는 세계 5위인데, 영국은 18위라는 말로 서한을 마무리했습니다.

유능하고 청렴한 걸로 알려진 싱가포르 공무원 사회에 이례적으로 부정과 부패, 막말과 불륜이라는 희대의 스캔들이 한꺼번에 터진 상황입니다. 이에 대한 민심은 정부에 비판적이고 차기 총선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분석도 있긴 하지만 싱가포르 국민들은 여전히 부패행위조사국의 수사에 신뢰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영국 시사주간지의 도발에 싱가포르 정부가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는 것 역시 지금까지 부패행위조사국을 중심으로 한 싱가포르 정부의 부정부패 해소 노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사를 마무리하던 중에 싱가포르의 부패행위조사국을 참고해서 만들었다는 한국의 공수처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 봤습니다. 최근에 <연합뉴스>에서 내 놓은 "구속영장 '3전 전패'…수사력 물음표 못 떼는 공수처"라는 기사가 눈에 띕니다. 공수처 출범 후 3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수사 하나 못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 보도가 아니더라도 공수처가 이제껏 뭘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싱가포르 장관들이 호화주택에 비싼 임대료를 내고 살고 있는 걸 두고 누군가가 특혜나 부당 이익 등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했을 때 싱가포르는 부패행위조사국을 내세워 조사를 하고, 그 결과는 온 국민이 알 수 있도록 보고서 형식으로 발간되어 국민에게 공개를 했습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고속도로 종점이 변경되고 그로 인해 대통령 일가가 큰 수익을 얻게 될 수도 있다는 의혹에 대해 공수처가 수사를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직 없습니다.

수해가 발생하자 인명사고 현장을 찾는 대신 본인 소유의 땅을 먼저 살피고, 해당 지역에 대한 정비사업을 우선 진행하는 김영환 충북지사나, 재건축을 통한 시세차익과 해명이 어려운 배당금 수익 등에 의혹이 모이고 있는 이동관 방통위원장 후보자 같은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검찰, 경찰, 공수처 중 어디에서도 먼저 나서서 의혹을 조사해서 국민에게 보고하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부정부패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부정부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시스템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부정부패를 척결하거나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싱가포르에는 살아있는 권력에도 칼을 들이 대는 부패행위수사국이 있지만, 한국의 경우 공수처는 존재감 자체가 희미하고, 검찰과 경찰은 야당 정치인의 치부에만 선택적으로 법의 잣대를 갖다 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국제투명성 기구에서 조사하는 부패인식지수. 한국은 박근헤 정부였던 2016년에 바닥을 찍고 문재인 정부 이후 지속적으로 개선되는 추세입니다. 올해는 어떤 결과를 받게 될까요? ⓒ 국제투명성 기구

 
앞서 싱가포르 정부가 인용한 부패인식지수를 보면 싱가포르는 세계 5위인 반면, 한국은 아직 31위입니다. 지난 10년의 변화를 보면 박근혜 정부 당시 매년 뒷걸음질을 치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개선되어 2022년에 최고 성적을 받은 게 이 정도 수준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지금의 한국 상황을 보면서 전 개인적으로 당분간은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를 갖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부패하는 건 역사가 증명하는 상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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