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찬 전 국방부 대변인이 6월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검찰단에서 최근 발간한 <권력과 안보>에 대해 군사기밀누설 혐의로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유성호
이제 비슷한 처지에 있는 또 한 사람을 떠올려보자. 부승찬 전 국방부 대변인이다. 부 전 대변인은 저서 <권력과 안보>를 통해 지난해 4월 천공이 대통령 관저 후보지를 방문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죄로 혹독한 고초를 당하고 있다. 얼마나 중대한 죄를 저질렀는지, 경찰과 군이 동시에 나섰다.
2월 초 대통령실이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직후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8월 말 검찰에 유죄 의견으로 송치했다. 지난해 4월 대통령 관저 후보지였던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둘러본 민간인은 천공이 아니라 역술인 백재권씨라면서. 그런데 정작 백씨는 조사조차 하지 않아 의문을 자아냈다.
국군방첩사령부의 압수수색으로 포문을 연 군은 경찰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방첩사 수사를 이어받은 군검찰(국방부 검찰단)은 7월 12일 부 전 대변인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책에 언급한 한미안보협의회의(SCM) 관련 내용이 군사기밀이라는 것이다. 또 한미 국방장관 회담을 기술한 대목에 공무상비밀누설 혐의가 있다며 민간 수사기관으로 이첩했는데 현재 서울경찰청에서 수사 중이다.
부 전 대변인에 따르면, 천공 의혹의 발원지는 남영신 전 육군참모총장이다. 지난해 4월 1일 미사일전략사령부 개편식 때 만난 남 전 총장이 화장실에서 귀띔해줬다고 한다. 요지는 공관 담당 부사관으로부터 천공이 김용현 경호처장(당시 청와대 이전 TF 부팀장)과 함께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과 국방부 영내 육군 서울사무소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것.
부 전 대변인의 책에 따르면, 남 전 총장은 "천공은 수염이 길고 도포자락을 휘날리고 다녀 남들 눈에 쉽게 띌 텐데 그게 가능하겠냐"고 미심쩍어하는 부 전 대변인에게 "공관 담당 부사관이 무슨 의도로 내게 허위보고를 하겠느냐"고 단호하게 말했다. 또한 며칠 뒤 부 전 대변인이 언론에 알려야 하느냐고 묻자 "현역인 부사관이 걱정되니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다.
현직 육군참모총장이 국방부 대변인에게 전한 것이라면 공적인 의미가 크다. 또한 군 지휘보고체계에 비춰 사실일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경찰은 남 전 총장이 부인하고 공관 CCTV에서 천공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 전 대변인의 주장을 거짓이라고 판단했다.
사실의 흔적
박 대령은 김 사령관에게서 들었다는 VIP 관련 의혹을 부하들과 공유했다. 사실의 흔적을 남긴 셈이다. 부 전 대변인은 일기에 관련 기록을 남겼다. 그가 책을 통해 천공 의혹을 세상에 알린 것도 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사건은 닮은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해병대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이라는 군 고위직 인사의 증언에서 비롯된 의혹 제기라는 점이 같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들은 얘기는 다 전언이다. 발언의 당사자로 지목된 사람이 부인한다는 점도 판박이다.
수사의 기본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도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다. 먼저 대질신문. 양 당사자의 주장이 엇갈리면 대질신문을 벌이는 게 보편적 수사방식인데 군검찰이나 경찰이나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무슨 관심법도 아니고, 한쪽이 부인하니 다른 한쪽은 거짓말이라고 단정하는 과단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다음으로, 간접증거의 배척이다. 박 대령 사건의 경우 그의 부하들이 외압 의혹에 대해 같은 진술을 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물론 박 대령의 얘기를 전해들은 것이지만, 박 대령 혼자만 주장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저런 정황에 비춰 보면 외압 의혹의 추는 거짓보다는 사실 쪽으로 기울어진 듯싶다. 해외 출장을 앞둔 국방부 장관의 갑작스러운 결정 번복과 안보실 개입 의혹, 장관의 법률참모인 국방부 법무관리관의 과도한 개입, 해병대 수사단이 경찰에 넘긴 수사서류를 국방부 검찰단이 급하게 회수한 점 등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고 의혹투성이다.
김 사령관의 통화내용도 이 같은 의혹을 뒷받침한다. 그는 중수대장과 통화하면서 국방부 법무관리관의 개입과 관련된 증거를 확보했는지를 확인하는 한편 "외압이고 (국방부에서) 위법한 지시를 하고 있다"는 중수대장 의견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부 전 대변인이 가진 증거는 일기다. 그는 대변인 재직 시 매일같이 일기를 썼는데, 참모총장한테서 들었다는 천공 이야기도 당일 일기에 기록했다. 물론 전언을 옮긴 것이기에 직접증거는 못 된다. 하지만 간접증거 또는 정황증거는 될 수 있다. 부 전 대변인이 판타지 소설가 지망생이 아니라면 말이다.
경찰 발표대로 만약 백재권씨를 천공으로 오인한 것이라면, 남 전 총장과 보고자인 부사관을 불러 확인하면 된다. 처음에는 천공이라고 믿고 보고했는데, 나중에 백씨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현장 보고자는 특정하지 않았는데 남 전 총장이 '천공'이라고 짐작해 부 전 대변인에게 전한 건지. 하지만 경찰이 이 부분을 면밀하게 조사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합리적 의심

▲남영신 육군 참모총장이 2021년 6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나는 지난해 7월과 10월 남 전 총장에게 전화해 천공 의혹을 물어본 적이 있다. 첫 번째 통화에서 남 전 총장은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보고받은 바 없다", "나하고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통화에서는 "들은 사람(부승찬)한테 확인하라"면서 불과 몇 달 전 일인데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에 없다"고 했다. 심지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고 해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경찰 수사에 믿음이 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백씨가 관저 후보지에 나타났다는 것이 곧 천공이 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두 사람이 따로따로 방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 전 대변인을 고발한 대통령실이 백씨의 방문 사실을 알면서도 밝히지 않은 점, 경찰이 수사 막바지에야 백씨를 '천공 대체자'로 내세운 점도 상식적이지 않다.
천공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다가 경찰이 CCTV 조사결과를 발표한 후 부인하는 취지의 답변서를 제출했다는 점도 석연찮다. CCTV를 증거로 내세우지만, 그것이 경호처의 보안점검을 거쳐 경찰로 넘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뢰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육군 서울사무소 CCTV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다.
박 대령과 부 전 대변인의 주장이 사실의 지위를 얻는 데는, 또는 근거 있는 의혹 제기였다는 평가를 받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당사자인 김 사령관과 남 전 총장이 시인하지 않는 한 끝내 실체가 드러나지 않거나 허위사실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수도 있다. 적어도 형식논리로는 그렇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박 대령이 제기한 외압 의혹은 매우 그럴듯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국방부가 법과 규정을 짓밟으면서까지 그토록 적극적으로 개입해 재조사라는 변칙적인 방법으로 혐의자와 혐의내용을 바꿔 경찰에 재이첩한 이유를 도무지 설명하기 어렵다.
VIP 관련 의혹이 사실이든 아니든, 박 대령이 김 사령관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우세하다. 박 대령 주변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 간접증거가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천공 의혹도 마찬가지다. 천공이 아니라 백재권씨라고 해서 부 전 대변인이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하는 건 무리다. 외려 그의 의혹 제기에 힘이 실린 면도 있다. 천공이든 백씨든, 관저 선정에 민간인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전언이기는 하지만 부 전 대변인이 아무런 근거 없이 말한 게 아니라는 점이 역설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진실을 아는 자는 고통스럽다고 했던가? 박정훈과 김계환, 부승찬과 남영신 네 사람 중 둘은 진실을, 둘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 만약 박정훈과 부승찬이 공상 소설을 썼다면, 그로써 얻을 이익이 무엇인지, 그로 인한 피해보다 큰지 따져볼 일이다. 마찬가지로 김계환과 남영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는지 헤아려 봐야 한다. 그것이 합리적 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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