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8 13:22최종 업데이트 23.12.08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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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대전형무소 우물 ⓒ 윤태옥

 
우물은 식수로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샘이다. 마른 목을 축이는 음용수는 물론, 한 끼를 준비하는 식수와 땀을 씻어내는 생활용수까지 일상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생명의 줄로 생명의 물을 길어 올리는 게 우물이다. 그런데 이런 우물에 산 사람을 빠뜨려 죽이거나 시신을 던져 넣어 죽음의 구덩이가 된 것을 상상해보라. 이 얼마나 끔찍한 반생명의 패악이고 반인륜의 악행인가. 우리나라에 이런 우물이 한둘이 아니다.

옛 대전형무소(대전 중구 중촌동 16번지 일대)의 우물이 그랬다. 지금은 투명판으로 덮인 우물 옆에서 6.25 당시 북한군이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을 학살했다. 유엔군이 대전을 수복한 후에 취사장 우물에서 171구의 시신을 인양했다. 우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대전형무소의 담장 일부가 남아 있다. 그곳의 안내판은 인민군에 의해 1557명이 학살당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1557명' 옆에는 또 다른 '수천 명'의 학살이 기록돼 있다. 

'우리'가 저지른 학살

6.25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던 여순사건 관련자들과 국민보도연맹원 등이 한국정부의 지시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체포 또는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의 심사와 분류에 의해 'A, B, C' 또는 '갑, 을, 병'으로 나뉘어져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A'와 '갑' 등급은 대전 인근 산내에서 대전형무소 일부 수용자들과 함께 모두 학살됐으며 그 수가 수천에 이른다고 한다.


1557명과 수천 명. 대전형무소를 장악한 자들은 그해 7월과 8월 남북을 가리지 않고 민간인들을 무지막지하게 학살했다.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키자 남침을 막지 못한 남한은 남으로 퇴각하면서 권력에게 순종하지 않는다고 낙인찍은 자국민 수천 명을 학살했다. 미군에게 북으로 쫓겨 가던 인민군 역시 자기들이 해방시켰다는 인민 1557명을 학살했다. 이렇게 싹 쓸어 죽이고 저렇게 싹 쓸어 죽이는 두 번의 학살, 바로 '우리'가 저지른 학살이다. 

대전형무소 수감자에 대해 한국의 군과 경찰은 골령골(당시 산내면 낭월리, 현재는 대전 동구 낭월동 13번지. 인터넷 지도에는 산내골령골이라는 지명도 올라 있다)로 끌고 가서 학살했다. 북한 인민군은 형무소 안팎에서 학살했다. 두 번의 학살이 발생한 터라 한국 군경에 의한 학살과 북한 인민군에 의한 학살로 구분하기도 한다. 한국 군경에 의한 학살은 장소성을 담아 골령골 학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의 기록에는 산내, 낭월, 골린골, 곤령골 등의 지명이 사용됐으나 최근에는 골령골이란 말이 주로 사용된다.  
 

1950년 7월 대전 산내골령골 민간인집단희생 당시 현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골령골 살해현장. "더 올라가면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겠어." 1950년 6.25 당시 골령골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주요 증언,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1950년 9월 28일 미군 24사단이 대전을 탈환하고는 대전형무소 안팎의 학살현장을 발굴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미군이 기록한 인민군 학살의 현장사진이 국내외 언론에 의해 보도했다. 대전형무소 안쪽의 밭고랑에 즐비하게 묻혀 있는 시신들, 발굴하며 드러난 시신, 부패한 시신의 악취 때문에 입과 코를 막은 채 발굴하는 민간인 등의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미군 전쟁범죄조사국의 전쟁범죄문서에 첨부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전쟁범죄다. 인민군의 학살은 전쟁 중은 물론 전쟁 이후에 지속적인 반공교육의 소재가 돼 전국민에게 잘 알려졌다. 지금도 대전형무소 터에서 반공애국지사 영령추모탑이 있다. 

골령골 학살은 인민군의 학살보다 먼저 발생했고 먼저 알려지기 시작했다. 북한은 전쟁 중에 언론사 기자 이외에 문학인들을 전선에 보내 종군기를 쓰게 했다. 그 가운데 한설야가 '골린골 학살'을 송고했다. 김남천은 7천 명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종군기에 썼다. 이런 종군기들은 당시에 인민군 점령지역에서만 보도됐을 것이다. 

골령골 학살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마거리트 히긴스의 손에서 시작됐다. 그는 인민군의 위장전술을 보도한 7월 13일자 기사에서 민간인 학살로 의심되는 내용을 덧붙였다. 김태선 내무부 치안국장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국전쟁 발발 이후 1200명 이상의 공산군 스파이와 게릴라들을 한국 경찰이 처형했고, 총살이 많아 초과근무를 해왔다고 보도한 것이다.   

히긴스의 기사는 그날로 소련 타스통신이 인용했고 북한의 조선통신사가 다시 받아서 보도했다. 헤럴드 트리뷴 통신원에 의하면 남조선 괴뢰 잔당들이 조선의 진보적 평화주민을 1천2백 명이나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 때문이었는지 미군 당국은 7월 16일 간호사를 제외한 모든 미국 여성을 한국에서 퇴거시킨다며 히긴스를 일본으로 추방했다. 당시 한국전쟁을 취재하다가 일본에서 휴식을 취하던 AP통신의 톰 램버트와 UP통신의 피터 갈리셔도 '미군을 나쁘게 보이게 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의 전선 취재가 금지됐다. 

당시 미국은 7월 12·13일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손이 뒤로 묶인 채 처형된 미군 21연대 병사들의 사진을 보도함으로써 북한의 잔학행위를 규탄하는 정치적 공세에 나선 시점이었다. 그런데 히긴스의 보도가 미국의 공세를 흔들어버린 셈이 됐다.

미·영에 파장 일으킨 한국 민간인 학살 사건... 기사 낸 언론사는 폐간
     
영국에서도 민간인 학살사건의 보도는 파장이 컸다. 영국의 <픽처 포스트>(Picture Post)는 7월 29일자 '한국에서의 전쟁'(War in Korea)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군과 국군의 퇴각, 피난민, 부상병을 비롯한 군경의 사진과 함께 겁에 질린 채 트럭에 실린 사람들의 사진을 실었다.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반역자로 의심돼 처형되는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전쟁 초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양측의 잔혹성을 지적하는 기사였지만 영국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로 인식했다. 이 기사를 실었던 <픽처 포스트>의 편집장 톰 홉킨스는 나중에 '유엔이 지지하고 있던 한국 정권의 정치범들에 대한 잔혹한 처리를 실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고, <픽처 포스트>는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이 사진은 훗날 1950년 7월 9일 공주 CIC 분견대의 지휘 하에 공주파견헌병대와 공주경찰이 공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보도연맹원들을 공주 왕촌의 살구쟁이 인근에서 총살한 사건으로 확인됐다. 
 

영국 <데일리 워커>(Daily Worker)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쓴 기사 ⓒ 강성현 제공

 
골령골 학살 보도로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기자는 영국 <데일리 워커>(Daily Worker)의 베이징 특파원인 앨런 위닝턴이었다. 그는 북한으로 입국해 7월 16일부터 5주 동안 한국전쟁을 취재했다. 평양 사리원 서울 수원을 거쳐 7월 30일 대전에 도착했고, 골령골 현장을 취재했다. '한국에 있는 미국 벨젠'(US Belsen In Korea, 벨젠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수용소와 가스실이 있던 곳)라는 제목의 기사는 8월 9일자 <데일리 워커> 1면에 실렸다. 9월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봤다'(I Saw the Truth in Korea)라는 16쪽의 팜플렛으로도 발행했다.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참혹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서히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살점과 뼈들을 볼 수 있었다. (중략)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 구덩이들은 깊이 6피트에 폭이 6~12피트였고, 가장 긴 것은 200야드, 2개는 100야드 정도였다.

위닝턴은 대전을 재탈환한 미군이 반박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기사가 사실임을 증명한다고 강조하면서 한편으론 골령골을 취재하지 않은 서방 언론도 비판했다. 위닝턴의 보도는 반미 적대감이 들어있고 과장도 있었지만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 훗날의 진상조사 과정에서 확인됐다. '나치의 벨젠수용소보다 더 참혹하다'는 위닝턴의 보도가 나가자 주영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도내용을 알리고 상세한 반박문을 요청했다.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주한 미국대사에게 학살부인 성명서를 받아서 보내라고 지시했다. 무초 대사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대사관의 질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8월 9일자 영국의 데일리 워커에 보도된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7월 초 대전 인근에서 한국 경찰이 학살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다. 어떠한 민간인 죄수들도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한 바 없다. 소송과 판결은 법률 규정에 따라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전쟁 포로들도 처형되지 않았고 오히려 제네바 협약에 따라 잘 대우받고 있다."

유엔군이 대전을 수복한 이후 사십여 년 동안 골령골 학살은 엄혹한 반공정책으로 인해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사라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언론은커녕 피해자의 유가족조차 발설하지 못하고 숨죽여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민주화되면서 암흑 속의 통곡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첫 걸음은 1992년 2월 <월간 말>의 보도였다. 1995년에는 대전충남 지역에서 골령골 학살에 대해 자체 진상조사를 시도했으나 보고서를 내지는 못했다. 골령골 학살을 충격적으로 환기하게 된 것은 태평양을 건너온 문서 한 뭉치였다. 1999년 말 재미학자 이도형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한국 정치범처형 보고서'를 발굴해낸 것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학살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었고, 현장의 사진 18장이 첨부돼 있었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육군 무관 에드워즈 중령이 보고서를 작성했고, 사진은 미군 극동사령부의 연락장교 애버트 소령이 촬영한 것이었다. 보고서는 1950년 9월 23일 워싱턴의 육군 정보부로 보내졌고, 정보부는 정보원이 완전히 믿을 만하며, 정보가치는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라고 평가했다.

보고서의 핵심은 한국이 7월 첫째 주 3일간 1800명의 정치범을 처형했고, 명령자는 대한민국의 최고위층(top level)이란 것이다. 18장의 현장사진은 처형 대상자들의 이송에서부터 준비, 처형, 확인사살, 매장까지 구체적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정보부대의 비밀 보고서가 전쟁특파원이나 한국의 언론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장면을 후세에 사료를 남긴 셈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은, 이상하고도 참혹한 전쟁
 

골령골 1학살지 B구역 발굴현장 ⓒ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 윤태옥

 
이 보고서가 알려지자 학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추모는 힘을 받았다. 그 다음해인 2000년 7월 8일 첫 번째 위령제를 학살현장에서 지냈다. 위령제를 준비하면서 조심스럽게 유족들이 모여 유족회가 결성됐다. 유족회와 시민단체는 정부에게 유해발굴과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진실화해위원회가 2007년 여름 70여 일에 걸쳐 유해발굴을 했다. 시신이 가장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사유지라서 건드리지 못했다. 그 옆의 다른 지점을 소규모로 발굴했는데 2곳에서 34구의 유해와 각종 유품 그리고 다수의 탄피가 출토됐다. 그러나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유해발굴은 중단됐다. 

유족과 시민단체들이 대통령과 국회에 후속조치를 건의했으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이들은 정부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2014년 2월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조직한 뒤 자체적으로 유해발굴에 나섰다. 공동조사단은 2015년 골령골에서 발굴을 진행했으나 시간과 예산의 제약으로 20여 구의 유해를 수습하고는 또 다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족회와 시민단체들의 끝질긴 노력 끝에 2020년부터 3년 동안 다시 유해발굴을 진행해 지금까지 총 1441구가 수습됐다. 유해는 세종시 추모의 집(세종시 전동면 봉대리 산30-9)에 안치했다. 골령골에는 아직도 유해가 남아 있겠지만 발굴은 금년으로 종결됐다. 발굴지점은 평평하게 복원됐고 내년부터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위령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유족회와 시민단체들의 끝질긴 노력 끝에 2020년부터 3년 동안 다시 유해발굴을 진행해 지금까지 총 1441구가 수습됐다. 유해는 세종시 추모의 집(세종시 전동면 봉대리 산30-9)에 안치했다. ⓒ 윤태옥

 

골령골 학살현장의 오늘 ⓒ 윤태옥

 
골령골 학살사건의 진상은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대전형무소는 전쟁 발발 당시 재소자 수는 약 4000명, 이중 2000명 정도가 정치사상범이었다. 또 전쟁 발발 후 대대적인 예비검속으로 보도연맹원 등이 대전형무소에 대거 수감되었다. 1950년 7월 1일 대전지검 검사장은 '공산당 우두머리를, 좌익의 극렬분자를 처단하라'는 전문을 대전형무소 당직주임에게 하달한 후 피난길에 올랐다. 마침 이날 임시감방에서 미결수들이 감방문을 여는 등 소동을 일으켰고 2사단 헌병대와 5연대 헌병대가 재소자 인도를 요구하며 처형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은 3차례에 걸쳐 산내 골령골에서 처형되었다. 1차는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됐다. 헌병대가 총살하고 헌병 지휘자가 확인사살을 했다. 2차는 7월 3일부터 5일까지 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정치사상범, 징역 10년 이상의 일반사범, 보도연맹원 등 약 1800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됐다. 3차는 7월 6일부터 17일까지 서울을 비롯한 경인지구 형무소에서 풀려났다가 다시 검거된 재소자, 청주형무소에서 이감된 재소자,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충남지역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됐다. 

국권을 상실해 식민지가 됐고, 식민지 백성들은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됐고, 패전국의 식민지 처지로 독립이 아닌 분할점령 신세가 됐다. 그들이 만든 분단에 내부가 자석에 끌리듯 두 개의 분단정부를 세웠다. 북한이 남침 전면전을 벌였고 남한은 자국민 학살로 응대한 꼴이 됐다.

혹시라도 극복할 수도 있었을 외세에 의한 분단을, 돌이킬 수 없는 내부의 대결로 굳힌 것이 바로 전면전과 민간인 학살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훨씬 더 많이 죽은 이상하고도 참혹한 한국전쟁, 그것이 우리의 현대사,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골령골 학살 현장에서 해설하는 임재근 박사 ⓒ 윤태옥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던 대전 골령골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위령과 추모와 위안과 답사란 이름으로 다녀갔다. 지금까지 골령골 학살의 진상규명과 유해발굴 그리고 방문자들에게 현장을 안내해온 임재근 박사(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산내 골령골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국가폭력의 현장입니다. 이러한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평화와 인권 교육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임재근 박사의 긴 이야기를 듣고 대전을 떠나 다음 답사지로 가기 전에, 내 뒷덜미에 들러붙은 한 가지 질문을 덧붙인다.

영국의 위닝턴은 자신의 기사로 커다란 시련을 당했다. 영국 정부는 그가 북한에서 인민군의 협조를 받았다는 이유로 배신자로 낙인찍고는 귀국하면 반역죄로 기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위닝턴이 몇 차례 한국전쟁 취재를 계속하자 영국 정부는 그의 여권을 말소시켰다. 이로 인해 위닝턴은 귀국도 하지 못하고 독일로 가서 거의 20년 동안 고독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기사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의 취재가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지도 무관했다. 오직 아군과 적군이라는 진영논리로 박해해 한 개인의 삶은 파탄지경에 빠졌다. 

인민군이 미군 포로를 처형한 것에 대해 미국이 비난하자 북한은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고 있다(1950.7.13)고 거짓말을 했다. 골령골 학살에 대해 남한은 국방장관 신성모의 입으로 학살을 전면 부정하고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고 있다(1950.9.22)고 거짓말을 했다. 영국은 거짓말이 아닌 기사에 반역죄로 협박하다가 자국민을 버렸고, 미국은 학살 전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하고도 극비로 분류해 문서고 깊은 곳에 감췄다.

전쟁이 국가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인가, 국가는 원래 거짓말을 잘하는 존재인가. 권력과 권력기구는 최소한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허망한 질문이지만 다시 한 번 묻는다. 이들 정부는 모두가 거짓말 면허장을 받았는가.
 

골령골 현장에 많은 방문객이 다녀갔다. ⓒ 윤태옥

 

골령골 현장에 걸린 현수막 ⓒ 윤태옥

 

골령골 학살현장의 오늘 ⓒ 윤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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