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9 11:46최종 업데이트 24.01.1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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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쌍굴다리 현장 ⓒ 윤태옥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시인 정현종의 '방문객')이라고 했다. 그렇게 귀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전쟁에서는 재고 조사하듯 머릿수로만 세기 일쑤였다.

가까운 과거에 벌어진 우리의 전쟁을 돌아볼 때 전쟁 지휘부 시각에서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전쟁이란 검은 구름 아래 우왕좌왕하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에서 조망하는 것도 필요하다. 돌아보는 사람 자체가 황제가 아니라 백성 아니던가. 돌아보는 시점에 사는 형편이 전쟁 당시보다 나아졌다면 더욱 그렇다. 국가의 공식적인 무력인 군대에 의해 민간인이 떼죽음에 당했을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야만 인간사회가 전쟁을 치루고도 조금씩은 나아진다고 그나마 기대하지 않겠는가. 


한국전쟁의 흔적을 시간순으로 밟아오면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한 학살(대전형무소, 보도연맹)과 북한군과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대전형무소)에 이어서 거의 같은 시기에 발생한 미군의 학살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왜 굳이 학살이란 사건을 들추냐고? 만에 하나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군대나 경찰이 민간인들을 적대시해 손쉽게 학살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자국민이든 적국민이든 타국민이든. 내 손자·손녀가 군인이나 경찰로서 민간인을 학살하려는 순간, 아니면 손자·손녀가 군경의 총구 앞에 억울한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미군이 대한민국에서 저지른 학살, 노근리 사건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 사건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생존자의 증언으로는 희생자가 400~500명이고, 50년이나 흐른 뒤에 정부가 조사해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희생자는 226명(사망 150명, 행방불명 13명, 후유장애 63명)이다. 1950년 7월 25~29일에 벌어진 사건이다.

사건은 1950년 7월 23일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 주민들을 소개시키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미군의 요구로 임계리로 피란했다. 25일 저녁에는 임계리에 모인 임계리, 주곡리와 타지인 등 500~600명의 피란민을 미군이 남쪽(후방)으로 이동하도록 유도했다. 이들은 그날 밤 영동의 하가리 천변에서 노숙을 했다. 다음 날은 미군이 이들을 국도에서 철도로 동선을 변경하게 했고 26일 정오에는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했다. 

이때 미군이 공중폭격과 기총소사를 퍼부어 철로 위에서 피란민 다수가 사망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피란민들은 노근리 쌍굴다리 아래로 피신했다. 굴다리는 당장의 공중폭격을 피할 만한 공간이었다. 쌍굴로 피신한 피란민을 미군이 양쪽에서 포위했다. 그리고는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기관총 사격을 가해 수백 명이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노근리 사건 당시 탄흔이 남아 있다. ⓒ 윤태옥

 

노근리 전시관에서 상영되는 미군 장병들의 증언 ⓒ 윤태옥

      
당시 상황에 대한 미군 병사들의 증언 일부를 노근리평화공원의 전시관에서 볼 수 있었다. 7월 26일 오후 미군 7기병연대는 기관총 부대인 H중대를 쌍굴다리 앞뒤로 분산 배치해 피란민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다 죽여! 대령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다 쏴버려! 나도 쐈다. 그들이 군인인지 뭔지 몰랐다. 어린애들도 있었다. 여덟 살이든 팔십이든, 눈이 멀었건 다리를 절었건 상관없이 마구 쏴댔다." 

"피란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겨누고 있을 때 반대편에 있던 연락병이 와서 피란민들을 모두 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도대체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냐고 물었다. 부녀자와 아이들도 쏴야 하냐고 물었더니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중대장이 저 사람들을 다 쏘라고 말했다. 나는 하지만 이들을 다 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위는 권총을 뽑아 내 귀를 겨누며 다 죽이라고 말했다. 너는 전쟁터에서 항명할 것이냐, 널 죽이겠다고 말했다."

미군은 피란민이 모여있는 쌍굴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했다. 지금도 현장에는 탄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탄흔 하나하나를 흰색 페인트로 표시한 탓에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쌍굴 앞의 작은 샘엔 희생당한 이들의 선혈이 낭자했다. 피란민이 목을 축이러 한 걸음만 나와도 기관총을 쏴댔다. 노근리 희생자 가운데 여성과 노인, 아이가 70% 정도였다. 
     
노근리에서 처음 폭격하기 하루 전인 7월 25일 대구의 임시 정부청사에서는 한미 양국의 주요 인사들이 피란민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날 양국은 미8군 사령관이 피란민과 민간인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데 합의하고, 아군 방어선을 넘는 피란민의 이동을 금지한다는 전문을 예하 부대에 하달했다. 미군의 전선에 접근하는 민간인에게 발포를 허용한 셈이다. 게다가 피란민을 소개시켜야 할 영동경찰서는 7월 24일 기차로 피란하고 아무도 없었다. 경찰이 먼저 철수했으니 이들은 버려진 꼴이었다. 시골사람들이 미군과 말이 통할 리도 없었다. 결국 쌍굴다리는 인간 도살장이 된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사과했지만... 아무도 기억 못하는 억울함 죽음들

노근리 사건에서 어린 두 아이를 잃은 정은영씨는 2014년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 노근리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호소했다. 1960년 노근리 사건 가해자인 미국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994년엔 노근리 사건을 담은 실화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했다. 이 실화소설을 계기로 한국 언론에서 노근리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정구도 현 노근리평화재단 이사장은 아버지 정은영의 집필을 도우면서 대를 이어 노근리 사건에 투신하게 됐다.

그러다가 1999년 9월 미국 AP통신이 발포명령을 담은 미군 8기병대대의 통신문을 보도하며 노근리 사건은 대한민국 국경을 넘어 미국과 더 넓은 세상에 알려졌다. 한미 양국 정부는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노근리 사건을 공동으로 조사했다. 미군의 인권침해 사건으로 결론이 나오고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곧바로 사과성명을 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노근리평화공원도 만들어졌다. 학살현장 가까운 곳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조형물이 있고 전시관도 있다. 

노근리 사건은 규모도 컸고 당사자가 일생을 바쳐 애쓴 덕분에 진상도 밝히고 희생자도 확인했다. 그러나 억울하게 죽었으나 억울하다는 말도 하지 못한, 아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억울한 죽음은 한둘이 아니었다.
 

ⓒ 이은영

 

노근리 사건 현장에 세워진 안내판 ⓒ 윤태옥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걷잡을 수 없이 밀리는 가운데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공군은 인민군 후방에 대한 전략폭격과 차단폭격, 전선에서의 근접지원 폭격을 수없이 했다. 그러나 적정에 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오폭 또는 과잉폭격이 많았다. 예를 들면 마을이나 도시를 적의 군수품이 보관돼 있을 수 있다고 하여 폭격했으나 폭격결과 보고에는 '적군이나 적황을 볼 수 없었음'이라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폭격기의 조종사 또는 미군의 상부에서는 피란민이나 민간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폭격이나 기총소사를 강행한 사례도 있었다. 북한군과 보급물자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한 조종사는 북한군이 아니라 민간인 25명 정도만 보인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통제관은 기총소사를 명령했고 결과는 15명의 민간인만 죽고 말았다.

전투지역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접근해 오거나, 남으로만 가려고 했거나, 적어도 아군 쪽으로 가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피란민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이들을 공격한 것이다. 조종사는 공중에서 강력한 무장을 갖춘 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고, 통제관은 멀리 후방에서 제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민간인에게 사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태연히 내렸던 것이다. 제 손에 피를 묻힐 상황이었으면 잠시라도 주저했을 것이나 그들의 물리적 위치나 군사적 위치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럴 의식도 없었던 것이다. 

미군으로서는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고, 피란민에 섞여 북한군 일부가 빠른 속도로 미군 후방으로 침투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고 심각한 북한군의 침투 사례를 확인했기에 노인과 부녀자와 아이들이 70%나 넘는 피란민을 집단으로 살상했어야 했는지 나는 조금도 수긍할 수 없다.

실제 그런 사례가 있었다고 해도 피란민을 접근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을 집단으로 살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이에 반해 조종사가 민간인 폭격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려고 했던 사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게 얼마나 상식적인 행동으로 인해 낙동강까지 밀렸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후방의 지휘소나 대한해협 건너의 극동군 사령부나 지구 저편 패권국의 컨트롤 타워에서는 엘리트 참모들이 전선의 상황을 종합해서 분석하고, 전략적인 대안과 전술적인 조치들을 긴박하게 검토해서 수시로 명령을 하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패전해 후퇴하는 장병들에게는 전쟁의 명분이나 전투의 규범은 현실적으로 거리가 멀다. 피란민이 미군의 방어선을 넘지 못하게 하라는 간결하고도 이성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 명령은, 긴박한 전장의 조급한 지휘관에게 전달되자 사투의 고함이 됐다.

즉결처분용 권총을 손에 쥔 지휘관의 째지는 음성을 듣고 행동하는 병사들은 거친 숨소리와 비명 같은 자기 함성에 취해 생사를 건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노리쇠에 건 손가락을 한번 당기고는 연발로 쏟아지는 살상의 굉음 속에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기고만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학살하라는 명령은 명령서 어디에도 없으나 현장에서는 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그게 명령전달의 오류든, 일선 장병들의 과잉행동이든, 군인집단에 배어버린 관행이든. 

베트남에서 반복된 미군의 학살
 

베트남 미라이 학살 현장 ⓒ 윤태옥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직전, 10개월 전에 계획했던 베트남 전쟁의 답사여행이 있었다. 답사일정에는 미라이 학살이라고 하는 미군의 학살사건의 현장이 있었다. 베트남 중부의 광응아이성에 있는 학살지를 찾아가는 날도 비가 내렸다. 입구에는 손미 마을 유적지(Son My Vestige Site)라는 검은 색의 큼직한 표지석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서양인 관광객도 꽤 찾아왔다. 전시된 자료에는 학살 현장의 사진들이 있었다. 모두들 입을 열지 않고 무거운 표정으로 전시된 사진과 자료를 관람하고 있었다. 현장의 미군 장병들은 학살이 아니라 정당한 작전수행이라고 인식했으니 이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정자세로 사격하는 병사의 사진이 보였다. 이 사진도 학살현장이라는 설명을 보지 않으면 긴박하게 수색하는 모범적인 병사로 보일 뿐이다. 

그다음 사진들은 몹시 참혹하다. 대여섯 명의 여성들과 아이들이 나무등걸에 한데 묶이는 사진이 있다. 앞에 선 중년의 여성은 울면서 뭔가를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데, 그 뒤의 젊은 여성은 아기를 안은 채 한 손으로 허리춤을 추스르고 있다. 사진에 찍히기 직전에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촬영 후에 전부 미군의 총격으로 살해당했다. 논두렁이나 길가에 널브러진 시신들의 사진들은 차마 필설로 묘사하기 어렵다. 희생자는 모두 504명이다. 전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17명은 임산부였고 어린이가 173명, 5개월 미만의 유아도 56명이었다. 

그런 참혹한 사진들이 한 장 한 장 느리게 짚어가던 내 시선은 아주 다른 분위기의 사진에서 결국 얼어버리고 말았다. 전선에서 미군 상급자가 병사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훈훈한 사진이었다. 학살의 결과가 훈장이었던 것이다. 과연 학살을 저지르고 훈장을 주고받는 이들을 어떤 말로 묘사할지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학살을 겨우 피한 몇몇 주민들은 전략촌이라는 인위적으로 만든 마을로 강제이주됐다. 전략촌은 아군 측이라고 확인된 주민들만 모아 새로 만든 마을이었다. 얼핏 보면 주민들을 위한 것 같지만 이 마을을 제외하면 누구든 죽인다는 광범위한 살상의 선언이기도 했다.

1950년 7월의 노근리 사건은 1968년 3월 베트남에서 미라이 학살사건으로 되풀이됐다. 우습게 보았던 인민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하던 미군이 노근리에서 그랬듯이, 북베트남이 기습적으로 벌인 설날(뗏) 대공세에 놀란 미군이 경기를 일으키듯 미라이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미라이 사건은 다음해 미국의 한 언론사가 참혹한 실상을 보도하면서 큰 문제가 됐다. 노근리 사건은 50년 전의 사건이었고 미라이 사건은 1년 전의 사건이었지만, 두 사건 모두 미국 여론의 질타를 받으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미라이 사건의 경우 학살에 가담한 26명이 조사를 받았고 중대장 한 명만이 가택연금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그마저도 3년 만에 해제됐다. 전선에서 벌어진 범죄는 대개 명령을 내린 고위 지휘관은 처벌을 피하고 현장의 하급 지휘관만 처벌하곤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유사한 사례를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베트남 미라이 학살사건 당시 현장 사진 ⓒ 윤태옥

 

베트남 미라이 학살 사망자 명단 ⓒ 윤태옥

 
학살은 중대범죄라고 하지만 일부는 국가의 사과와 보상이 있기는 해도 실제 처벌이 없거나 처벌하는 제스처만으로 끝나는 게 많다. 제주4.3이든 여순10.19든 보도연맹 사건이든 그랬다. 제대로 처벌된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또 이런 학살을 저지를 수 있다고 나는 우려한다. 특정 행위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해서도 반복되지만, 처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긍정의 메시지가 돼 반복할 수 있다. 상황이 그러면 그럴 수도 있다는 변명 속에 어쩔 수 없는 행위라고 각인돼 몸과 마음에 배는 법이다. 

노근리 사건은 한미 양국 정부가 진상을 규명했고 특별법도 제정했고 기념공원에 전시관까지 마련됐다. 이에 대한 우리 국군의 기록은 어떨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6전쟁 주요전투 1, 2>에도 <한 권으로 읽는 6.25전쟁>에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아쉽다. 동맹군을 포함한 자신의 흠결에 대해서도 담담해야 역사로서의 가치가 있다. 빼지 않을 것을 빼면 신뢰가 반감되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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