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02 10:24최종 업데이트 24.02.0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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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전승비에 있는 조형물 ⓒ 윤태옥

 
낙동강 전선은 북한 인민군 기습남침의 최대치였고 유엔군이 버텨낸 최후의 방어선이자 북진으로 전환하는 출발선이다. 최후의 공세와 결사적인 저항이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무한정 쏘아대는 포탄과 융단을 깔듯 부어댄 폭탄들. 그 속에 죽어간 이들이 흘린 피와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함성과 꺼져가는 숨소리가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국 현대사에 굵고도 깊게 그어진 또 하나의 분기선이 됐다.

낙동강 최후 대치선은 마산에서 왜관까지의 낙동강과, 왜관에서 포항까지 산악지역을 잇는 선이다. 마산에서 대구까지의 낙동강 일대는 미군이, 대구에서 포항까지의 산악지대는 국군이 담당했다. 시계방향으로 미25사단, 미24사단, 미1기병사단 그리고 국군 1사단, 6사단, 8사단, 수도사단, 3사단이 배치됐다. 이 방어선을 공격하는 인민군은 1개 전차사단을 제외하고도 보병 13개 사단이었다.


7월 31일부터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면서 크게 위험한 상황이 두 번 있었다. 인민군 6사단이 진주까지 점령하고 빠르게 마산을 공격한 것이 하나다. 이들의 진공 속도는 유엔군의 판단이 미처 따라잡지 못했었다. 인민군 6사단의 진공을 뒤늦게 알고는 황급히 미25사단을 마산 방면으로 이동시켜 이들을 막아냈다.

또 하나는 국군 수도사단과 8사단이 안동에서 철수하는 과정이었다. 엄호부대인 수도사단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8사단이 도강하기 전에 안동의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했다. 이로 인해 인민군에게 바짝 추격을 당하던 8사단은 부대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격렬한 전투의 연속... 낙동강 전선의 당시 상황
 

ⓒ 봉주영

 
인민군은 7월에는 13개 사단 가운데 11개 사단을 동원해서, 8월에는 13개 사단 전체를 투입해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제공권과 제해권은 개전 초부터 변함없이 미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런데 지상에서는 낙동강까지 밀리기만 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달라졌다. 유엔군은 방어선을 크게 압축된 만큼 방어력의 밀집도는 그만큼 높아졌고 미국 본토와 일본에서 오는 지원에 힘입어 병력과 무기에서는 이제 인민군보다 우세해졌다. 세계 최강의 기반은 인구, 자원, 경제력 그리고 군사력이다.

그에 비해 인민군은 전선에서는 미공군의 융단폭격으로 병력과 물자를 집결하기 어려워졌다. 후방에서는 보급로 자체가 이미 길어졌을 뿐 아니라 계속되는 강력한 폭격으로 보급에 차질이 커지면서 심각한 물자와 병력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국군과 미군을 격파하며 급속하게 남진해 오던 기세는 이미 눈에 띄게 처져가고 있었다.

8월 초 시점에서 유엔군은 병력 23만 2천으로 인민군 7만 9천의 거의 세 배가 됐다. 인민군 초기공세의 주역인 500여 대로 전차는 160여 대(자주포 포함)였지만 유엔군의 전차는 5백여 대로 인민군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인민군은 38선에서 3대 1의 우세한 무력으로 남침을 시작했으나 낙동강에 와서는 그 반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정적으로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가 잘리게 되자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으로 급속하게 패퇴했다.

낙동강 전선 또는 낙동강 방어전이라고 통칭하지만 실제 전투는 넓은 지역에서 대단히 많았고 격렬했다. 국방부의 군사(軍史) <6.25전쟁 주요전투> 1, 2권에는 8월 1일부터 9월 16일까지 독립된 항목으로 분류된 전투만 육군 25개, 해병대 4개.

용기리 전투, 낙정리 전투, 의성 전투, 영산 전투, 킨 특수부대 작전, 금무봉 전투, 보현산 전투, 기계 전투, 포항 전투, 수암산-유학산 전투, 다부동 전투, 작오산 전투, 군위-의홍지역 전투, 비학산 전투, 안강 전투, 가산-팔공산 전투, 조림산 전투, 마산 서북방 전투, 수암산 전투, 가산 전투, 기룡산 전투, 호명리 전투, 화산 전투, 영천 전투, 314고지 전투가 육군의 전투다.

고사리 전투, 진동리지구 전투, 통영 상륙작전, 원문고개 방어전투 등 4개는 해병대의 전투다. 인천상륙작전(9.15) 이후 비로소 우리 군사에서도 돌파 진격 토벌과 같은 어휘가 전투의 명칭에 등장한다.

낙동강 전선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이 너무 많아 그 이름을 일일이 부른다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군사로 정립된 개별 전투의 명칭만이라도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은 어떤가. 전쟁은 한 사람의 영웅으로 인해 승패가 갈리는 것처럼 운위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 서사에 따라 그렇게 운위할 뿐이다.

현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수많은 주검이 골을 메운 다음에야 누군가가 그곳을 통과하고, 통과한 뒤에 승리도 하고 패배도 한다. 일반인들은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을 이 많은 전투 목록을 보면서 어찌 한 개인을 영웅이라 하거나 어느 하나의 전투가 전쟁의 전부인 양 치켜세우기만 하겠는가. 수많은 망자의 명단과 치열한 전투의 목록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를 갖는 게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내가 낙동강 전선을 한 묶음으로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은 휴전선 일대를 여러 차례 답사한 다음이었다. 휴전선을 다니면서 비로소 그에 비견되는 낙동강 전선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답사여행은 통영에서 시작해 마산, 함안, 창녕, 달성까지 가서 대구에서 하룻밤을 쉬고, 다시 칠곡, 신녕, 영천을 거쳐 영덕의 장사리 해변 근처에서 또 하루를 묵었다. 다음날 포항까지는 가지 못하고 다른 사정으로 인해 서울로 돌아왔다. 이 정도 여행이면 자가운전으로 2박3일 정도면 충분하다.

통영
 

통영지구 전적비 ⓒ 윤태옥

 

한국전쟁 당시 통영에 해병대가 처음 상륙한 곳 ⓒ 윤태옥

 
경남 통영 원문고개에는 해병대 통영상륙작전의 기념관과 전적비가 잘 꾸며져 있다. 상륙현장인 장평리 해안에는 '해병대 처음 상륙한 곳'이란 커다란 바위 표지가 있고 일대는 작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통영상륙작전은 8월 16일 인민군이 고성에서 통영으로 진공해 들어오자 다음날 저녁 해병대가 통영의 장평리 해안에 상륙해 이틀 만에 인민군을 몰아낸 작전이다. 해병대는 통영의 관문인 원문고개를 굳게 방어(8.19~9.11)하여 임무를 완수하고는 서울탈환작전을 위해 9월 23일 통영을 떠났다.

이 전투는 낙동강 방어전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인민군은 6사단이 마산 진동리에서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동진하지 못하자 7사단의 1개 대대를 증강시켜 통영으로 침투시킨 것이다. 통영으로 우회해 마산을 봉쇄하고 부산으로 진격하려는 것인데 이를 차단한 것이다. 이 작전은 개전 이후 수세적인 지연전과 방어전을 계속해 오던 가운데 적극적인 공세를 성공시켰기 때문에 더 크게 평가받는다.

해병대로서는 자긍심을 크게 세운 전투이다. 창설 이후 최초로, 그것도 단독으로 시도한 상륙작전이었고, 국방장관의 표창을 받았다. 통영전투에 대해 <뉴욕헤럴드트리뷴>의 기자 마가렛 히긴스가 '귀신이라도 잡겠다(They might capture even evil)'는 기사를 송고해 훗날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슬로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해병대는 이에 앞서 통영상륙 작전 직전에 벌인 진동리 전투(8.6~12)에서 인민군 6사단과 격전을 벌여 동진을 저지해 전장병 일계급 특진이라는 포상을 받기도 했다.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했던 나로서도 소회가 적지 않은 곳이다.

함안
     

6.25 격전 함안민안비 ⓒ 윤태옥

 

함안군 6.25전쟁 참전 경찰 승전탑 ⓒ 윤태옥

 
마산합포구의 바로 북쪽이 경남 함안군이다. 함안에서 서북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 1021번 지방도가 끝나는 부분에 6.25격전 함안민안비(民安碑)가 있다. 그 옆에는 함안.여항지구전투 희생자위령비도 있다. 위령비 뒷면에는 8월1일 함안에 들이닥친 인민군에 대항해 9월 15일까지 서북산을 빼앗고 빼앗기기를 19차례나 했던 극렬한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서북산 정상에는 서북산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함안의 가야읍 도항리 125-20에는 자유수호전승의 터라는 기념비가 있다. 인민군이 8.10~9.1까지 여항산 삼봉산을 거점으로 수십 차례 공격을 해왔을 때 이 지역의 애향청년대원과 경찰들이 사투를 벌여 막아낸 것을 기리고 있다. 실제 이 전투는 미25사단이 주역이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우리나라 중장년들이 잘 아는 '처녀 뱃사공'의 노래비가 함안군 서촌면 대산리에 있다. 이 노래도 한국전쟁에 직접 관련이 있다. 가수 윤항기, 윤복희의 부친인 윤부길이 노랫말을 지은 것이다.

유랑극단 단장이었던 그는 1953년 9월 6.25 피란을 끝내고 서울로 가면서 함안의 가야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면 악양에서 머무르게 됐다. 당시 이곳 나루터에는 군에 입대한 후 소식이 끊긴 박기준(전사)을 대신해 두 여동생이 나룻배를 저어 길손을 건네주며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애절한 이야기를 들은 윤부길이 '낙동강 강바람이'로 시작하는 노랫말을 지어 한복남이 작곡을 하고, 황정자의 노래로 1959년 발표했다. 전쟁이 휩쓸지 않은 지역이 없었고 전쟁으로 구겨진 사연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함안에는 6.25전쟁경찰승전탑도 있다. 전선을 따라 밀려온 전남과 전북의 경찰이 경남경찰과 함께 6800명 규모의 경찰부대를 이루었다. 이들은 미25사단과 함께 7월 30일부터 9월 16일까지 이 지역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창녕
 

미2사단 23연대 박진전투 기념비 ⓒ 윤태옥

 

참전미군이 직접기록한 한국전쟁 도록 ⓒ 윤태옥

 
경남 창녕의 남지읍 월하리에는 박진전쟁기념관이 있다. 이 지역은 낙동강 물줄기가 서쪽으로 돌출한 모양으로 흐르는 지역이다. 미2사단 23연대가 8월 31일에서 9월 15일까지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앞마당에는 작은 기념비가 깔끔하게 세워져 있다. 박진전투(8.31~9.15)에서 전사한 208명의 미2사단 장병들, 특히 전원 전사한 중대장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고 기록돼 있다.

박진전쟁기념관에는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미군들의 기록들을 모아두고 있다. 기념관 바로 앞의 작은 언덕에 올라가면 박진지구전적비가 있다. 그해 8월 5일 인민군 4사단이 이목 나루터를 이용해 기습 침투해 8월 11일 영산읍까지 침공했다. 이에 유엔군은 예비병력을 이곳에 집중시켜 일대 혈전을 전개해 19일에는 낙동강 서쪽으로 완전히 격퇴시킨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6.25전사자 유해발굴 기념지역(1호)이라는 표지가 전적비 옆에 세워져 있다. 그해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인민군 3개 사단과 미군 2개 사단이 33일간 공방전을 벌였다. 특히 2사단 23연대는 1458명이 피해를 입어 전투력이 38%로 감소했다. 이 지역에서 2010년부터 전사자 유해 및 유품을 발굴했던 것이다. 유해발굴은 늦었지만 잘한 일이다. 보훈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한 생명으로 대우하는 것이 기본이 아니겠는가.

영산지구전적비는 창녕의 영산면에 있는 남산호국공원에, 창녕읍의 만옥정공원에는 창녕지구전승비가 있다. 이 전승비 역시 낙동강 돌출부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이 전승비는 1959년에 건립됐는데 UN전적비라는 이름도 함께 갖고 있다. 좌우에 U와 N 두 알파벳을 크게 새겼다. 대전 보문산에 있는 대전지구전승비와 거의 같은 디자인이다. 1959년 같은 해에 건립됐다고 하니 하나의 디자인을 활용한 것 같다.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 ⓒ 윤태옥

 

지게부대 ⓒ 윤태옥

 
낙동강 전선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전투는 다부동 전투다.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이라고 묘사하곤 한다. 다부동 전투는 국군 1사단이 8월 13일부터 28일까지 다부동에서 인민군 1, 13, 15사단과 105전차사단의 공격을 저지한 성공적인 방어전투다. 인민군의 공세가 워낙 거센 탓에 1사단의 방어정면인 낙동강 서안의 5.6×12킬로미터 지역을 표적으로 B-29 폭격기 98대를 출격시켜 960톤의 폭탄을 퍼부었다.

이같은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미27연대에 이어 미23연대도 투입했고, 국군 10연대도 1사단에 배속시켰다. 3개 연대가 추가됐으니 1사단만의 전투가 아니라 2개 사단이 인민군에 맞서 격전을 치른 것이다.

이 전투에서는 인민군 전차부대와 미27연대가 격렬한 전차전을 벌이기도 했다. 전차포가 적 전차를 향해 직사포를 쏘는 광경이 마치 핀을 향해 날아가는 볼링공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Bowling Alley) 전투라고도 불렀다.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 126-2의 다부동전승비가 바로 이 전차전을 기리는 기념비다. 기념비에는 Memorial of the 'Bowling Alley' Victory라고 돼 있다.

다부동 전투는 전장이었던 경북 칠곡군 가산면에 전적기념관과 전승비 등이 잘 꾸며져 있다. 이곳에는 구국용사충혼비와 구국경찰충혼비도 있다. 구국용사충혼비는 1994년부터 3년 동안 당시의 격전지를 수색해 유골 259점을 안장하고 세운 것이다. 명각비도 인상적이다. 다부동전투에 참전한 전사자와 생존자들을 병적까지 확인해 일일이 당시 소속과 계급, 이름을 새긴 것이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야외에는 지게부대 위령비가 있다. 치열한 전투 속에 무기와 탄약을 지게로 지어 나르던 민간인들의 노고와 희생된 이들을 기리고 있다. 기념관 전시물 가운데 노무부대(The A-frame Army)란 항목에서는 '전투의 절반은 노무자들이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당시 대대장의 회고를 전하고 있다. 유엔군은 전장에 보급품을 운반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노무자들을 흡수해 한국노무단(KSC)를 창설해 운용했다. 전쟁은 군인만의 일이 아니다.
 

백선엽 장군 전적비 ⓒ 윤태옥

 
다부동 전투는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전투다. 2022년 여름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백선엽호국구민비가 있었다. 1951년 4월 지역주민들이 다부1리의 소야고개에 세웠던 것을 2003년에 기념관 부지 안으로 이전한 것이다. 그런데 2023년 7월에 백선엽의 동상이 세워져 '다부동 전투= 백선엽'의 이미지는 더 강화됐다.

백선엽과 관련해서는 가산면 동명초등학교 교정에 백선엽장군전적비도 있다. 백선엽의 '지략과 완전'을 기념하기 위해 1973년 지방 유지들이 당시 1사단 사령부가 위치했던 자리에 전적비를 건립했다고 기록돼 있다. 내가 이 초등학교를 찾아 전적비를 보고 싶다고 하니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외부인의 참관을 꺼리는 눈치였다. 논란이 있고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 때문이어서일까, 위치가 초등학교 안이어서였을까.

전쟁에서 누군가를 영웅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전사한 경우라면 영웅이란 말은 수사로서 자연스럽다. 전쟁이란 수많은 전선의 병사가 죽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바닷가 모래만큼이나 많은 죽음을 옆에 두고 산 사람에게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신중해야 옳지 않을까.

차라리 군적도 없이 전선에서 포탄을 등에 지고 나르다가 죽은 이들이나, 시신 수습은커녕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실종 병사 또는 무명용사들을 모아 다부동의 영웅이라고 하는 어떤가.

동작동 국립묘지에도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무명용사비다. 이런 뜻에서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는 지게부대위령비와 명각비는 큰 의미가 있다. 세심한 배려가 내 눈에 뜨인다.

영천
 

영천지구 전적비 ⓒ 윤태옥

 
경북 영천에는 영천전투 메모리얼 파크가 있다. 그 안에 새로 건립한 영천지구전적비와 그 전에 세워진 것을 옮겨온 영천전승비가 각각 자리잡고 있다. 신녕지구전승비(팔공산 동쪽, 신녕면 화성리 732-1), 영천전투호국기념관(청정리 산8)도 있다. 모두 1950년 9월 2~13일 영천지구에서 인민군 2군단을 방어한 국군 2군단의 전투를 기리는 기념물들이다.

포항, 왜관, 장사리

왜관지구전승비(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882-65)와 왜관지구전적기념관(경북 칠곡군 석적읍 중지리 산33), 포항의 기계안강지구전투전적비와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경북 포항시 북구 용흥동 산103-1), 포항지구전투전적비 등은 사전에 조사는 했으나 내가 나선 답사길에서는 시간이 부족해 직접 찾아보지는 못했다. 이 답사여행의 마지막은 경북 영덕의 장사리였다. 장사전승기념관이 있는데 이 장사상륙작전은 뒤에 따로 상술하기로 한다.

낙동강과 휴전선은 한국전쟁의 흔적들만 찾아봐도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다. 휴전선은 2024년 우리의 현실을 규정하는 현장이고, 낙동강은 대한민국이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반격을 한 현장이기도 하다. 휴전선과 낙동강은 동선을 구성하기도 좋고 현대사뿐 아니라 멋진 풍광과 지역의 음식들이 풍부해서 좋은 여행으로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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