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에서 제작한 미국 범죄 드라마 TV 시리즈 <이퀄라이저>에는 퀸 라티파가 전직 CIA 요원 로빈 맥콜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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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호기심 사이에서 나는 후자를 선택했고 생각보다 무난한 감상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에피소드의 마지막 결국 무사히 생존한 직장 내 성폭력 생존자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묻는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그러자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기나긴 인생에서 한 가지의 사건을 겪었고 앞으로 써내려갈 챕터는 아주 길다. 분명 당신은 지금의 경험에서 벗어나 새로운 내용으로 인생의 나머지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뭉클한 대사이긴 하지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닐 텐데? 아니던데? 인생에서 어떤 일은 깔끔하게 갈무리하여 구석에 수납해두는 게 불가능 하고 마치 쏟아진 잉크처럼 삶의 모든 페이지에 흔적을 남긴다. 물론 '모든 페이지'라는 표현은 부정확한 말이긴 하다. 나도 이제 4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모르는 미래가 있는 셈이니까.
드라마를 끄고 곰곰이 대사를 곱씹었다. 반사적인 억하심정이 지나가고 나니 침착하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공평하게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틀린 부분은 이미 내가 생각한 것, 그런 식의 경험에서 깔끔하게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아마 앞으로 이어질 인생에도 흔적이 남겨질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저 대사가 맞고 내가 틀린 부분도 있다. 그 경험의 흔적이 늘 선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옅어지기도 하고 오히려 갑작스레 진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조력과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결국 경험의 흔적은 점점 옅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일단 버티는 것에 성공한다면 결과적으로는 흔적이 있었던 흔적만 남게 된다.
상처는 결국 옅어질 수 있다
거의 투명하게 옅어져서 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의식할 수 없지만 언젠가 그곳에 고통스러운 경험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오직 나만이. 모든 것이 사라진 백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삶의 다음 챕터에 새로 쓴 내용들은 아주 선명하게 잘 보이게 된다. 과거의 경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새로 마주하는 일들이 명백하게 더 우선이고 먼저가 된다. 변화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완벽한 해방이란 없다.
하지만 그게 자유가 없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니다.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우는 건 불가능 하고 벌어진 일이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가능해진다. 다시 힘차게 내가 원하는 걸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다는 걸 알게 된다.
새로운 내용으로 인생의 나머지 챕터를 채울 수 있다는 건 그래서 절반의 진실이다. 과거도 현재도 모두 함께 미래를 향해 간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란 마치 짐승과도 같은 것이어서 길들여지는 것 같다가도 사람을 할퀴길 반복한다. 기나긴 새벽을 마주하는 시간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횟수와 괴로움은 결국 줄어든다. 적절한 조력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비록 원하던 방식과 그림대로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다시 능동적으로 새 삶을 꾸릴 수 있을 정도만큼은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남은 내 인생을 새로운 내용으로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하고 싶다. 완벽하게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아지긴 할 것이다. 그러니 희망을 가지고 버텨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사족. 4년 전의 나는 내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나는 무척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따스한 관심과 애정으로 나를 삶에 강하게 붙들어 둔 친구들도 있었다. 그 모두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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