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음료 자동판매기(1982)
연합뉴스
우리나라 커피 역사에서 암흑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의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1970년대의 커피 문화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셋이다. 이 중 마지막 하나가 등장한 것이 1978년이었다. 즉, 인스턴트커피의 국산화와 커피믹스의 탄생, 다방의 대유행에 이어 '커피 자동판매기'가 등장한 것이 1978년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용어 '오토메이션 시대'의 특징이 커피에도 등장한 것이다.
거리에 커피 자동판매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8년 3월 22일이었다. 종각, 시청, 서울역 세 곳에 설치되었고, 커피 한 잔 가격은 100원이었다. 롯데산업과 화신전기가 일본에서 수입한 자판기를 설치한 것이다. 물론 자동판매기로 첫선을 보인 것이 커피는 아니었다. 1970년대 초반 극장과 백화점 등에 등장한 피임기구 자동판매기였다. 인구 증가 억제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이어서 커피 자동판매기가 등장한 것이다.
거스름돈 반환과 주화 감별 기능을 갖춘 자동판매기가 국내 처음으로 삼성전자에 의해 개발되어 판매에 들어간 것이 이해 6월이었다. 첫 제품으로 담배용 자동판매기 2백 대를 생산하여 동방빌딩에서 사용하였다. 이어서 8월에는 커피 자동판매기도 생산 판매를 시작하였다. 삼성전자에 이어 금성사, 동양정밀 등도 일본의 기술 협조를 받아 9월에 자동판매기 생산을 시작하였고, 롯데산업과 화신전기, 대한전선도 자판기 생산 사업을 추진하였다.
여름이 되자 자동판매기의 냉커피값이 50%씩 기습 인상되었다. 롯데산업의 자동판매기에서 판매되는 냉커피, 냉밀크커피, 냉블랙커피 등 얼음이 들어간 커피가 100원에서 150원으로 인상됐다.
롯데산업은 서울 시내 지하철 대합실, 회사 등에 4백 대의 자판기를 설치하여 대당 60잔, 하루 평균 240만 원 정도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커피 자동판매기가 이해 9월에 설치되는 등 그야말로 우후죽순 등장하는 것이 커피자동판매기였다.
커피자동판매기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화신전기는 자사 생산 제품 400대를 9월 말까지 일본의 벤다재팬사에 공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3년간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1978년 말 전국에 설치된 커피 자동판매기 대수가 다방 개수를 넘어섰다. 심지어 초등학교 매점에도 커피 자동판매기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자동판매기 열풍 속에 우려의 목소리가 등장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용어 이른바 '오토메이션 시대'에 대한 불안이었다. 인간이 편리하고자 만든 기계가 정도를 넘어 인정마저 차단하는 괴물로 등장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 7월 31일 자 '경향신문'은 동전 한 닢 넣으면 냉음료, 온음료는 물론 치즈와 양주까지 쏟아져 나오는 자동판매기의 보편화 현상이 어디까지 전개될지 모를 일이라는 우려를 전했다.
2000년대쯤엔 외로운 홀아비가 길에서 주화를 넣으면 미모의 여성 복제인간이 불쑥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라고 하였다. 우려했던 그 2천년대가 시작된 지 20년 이상 지났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AI에 의한 인간 지배가 반현실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흥미로 이용하던 자동판매기에 대한 기피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커피 자동판매기가 등장한 지 1년 정도 지난 1978년 말부터였다. 오랫동안 동전을 삼키는 공중전화를 경험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동전을 삼키는 자동판매기를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커피 자동판매기의 잦은 고장이 시민들의 불만을 만들었다. 몇 차례 판매기에 동전을 넣었다가 동전만 잃은 뒤 다시는 이용할 생각이 없어졌다는 시민들의 제보가 이어졌다. 고장 시에 신고해 달라는 안내서가 판매기마다 붙어 있었지만 1백 원을 받자고 다시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거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었다.
커피의 역사에서 편리함을 위해 맛을 양보하였던 대표적인 나라가 20세기 중반 미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에 등장한 인스턴트커피, 다방, 커피자판기의 열풍으로 커피는 고유한 맛이나 향으로 즐기는 고급 음료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마시는 저급한 음료로 변하여갔다. 그동안 정부의 커피소비 억제 정책에 부응해 캔커피 생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동서식품이 캔커피 시장에 진출한 것도 이해였다.
(커피인문학자, 교육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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