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1 18:56최종 업데이트 24.09.21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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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이미지 개선'은 전두환 정부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며 공식적으로 내세운 명분이었다. 반면 국론통일이라는 이름의 반정부 여론 잠재우기는 스포츠 행사를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숨겨진 목표였다. 첫 번째 목표는 나름대로 달성하였다. 분단국가 대한민국의 경제적 잠재력과 문화적 특성을 해외에 알리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목표는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둑 용어를 빌자면 일종의 자충수였고, 우리말 속담 '자기꾀에 자기가 넘어간 격'이었다.

아시안게임을 2년, 그리고 서울올림픽을 4년 앞둔 1983년 12월 정부는 학원자율화를 선언하였다. 대내적으로는 정권이 안정화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정치 탄압이 없는 민주국가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초청도 같은 맥락의 보여주기 행사였다.

1984년 봄학기 시작과 함께 학원자율화 조치가 하나둘씩 취해졌다. 대학에 상주해 있던 경찰 병력이 철수를 시작하였고, 100명 가까운 해직 교수들과 700명이 넘는 제적 대학생들이 캠퍼스로 돌아왔다. 이후 대학마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학생회가 부활하는 등 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정부 투쟁은 더욱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결국 1987년 '6.29선언'의 도화선이 되었고, 정치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열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지식인과 학생들이 모여드는 곳이 대학가 다방이었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서울의 학림다방과 독수리다방, 광주의 우다방, 전주의 가톨릭센터다방 등이었다.

국산차 소비 급증... 희한한 캠페인까지

1984년 11월 8일 자 <경향신문>은 전면 광고를 통해 "외제 물건 없는 가정을 찾습니다"라는 캠페인을 벌였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유치는 커피 소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국산차 소비의 증가에 따른 커피 소비의 감소였다. 1984년 2월 주요 일간지들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산차 소비가 불과 1년 사이에 급격히 증가하였다.

언론사마다 표현은 다양했다. <조선일보>는 '국산차 판매량 13배 늘어/작년'이라고 표현하였다. 1982년 한 해 서울 시내 다방의 차 판매량 중 국산차 비율이 2.6%에서 1983년에는 33.4%로 증가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판매량'이 아니라 '판매량에서 국산차가 차지하는 비율'이 13배 증가한 것이었다. 제목만 보면 판매량이 13배 증가한 것으로 오해할 만한 보도였다.

반면, 같은 자료를 이용한 보도에서 <경향신문>은 '1년 새 판매량 50.8% 늘어, 국산차 소비 급증'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내용을 보면 서울시내 다방의 국산차 판매량이 2.6%에서 33.4%로 30.8%(p) 증가하여, 1천 5백만 달러의 외화를 절약한 셈이라는 것이었다. 이 보도는 오해가 아니라 오타가 문제였다. 내용을 보면 국산차 판매량 비중이 30.8% (p)증가하였다는 내용인데, 제목은 50.8%(p) 증가로 표시하였다.

국산차 중 가장 많이 팔린 것은 율무차로 전체 차 판매량의 12.5%를 차지했고, 생강차(3.5%)부터 들깨차, 쌍화차, 인삼차, 홍차, 칡차, 두향차, 구기자차(1.0%)가 뒤를 이었다. 국산차의 약진으로 커피 판매가 차지하는 비중은 97.4%에서 66.6%로 감소하였다. 큰 감소였다. 시민들이 기호성 차보다는 건강에 좋다는 차를 찾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서울시 관계자의 해석이었다.

당시 국산차 유행에는 국산품 애용을 위한 공공캠페인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매우 흥미로운 국산품 애용 캠페인이 경향신문사 광고국 주관으로 벌어졌다. 1984년 11월 8일 자 <경향신문>은 전면 광고를 통해 "외제 물건 없는 가정을 찾습니다"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모초등학교 5학년 담임교사가 쓴 교단 일기를 활용한 캠페인이었다. "'집에 있는 외제 물건 적어오기' - 만일 당신의 자녀가 이런 숙제를 받았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적어 내겠습니까? '우리 집은 외제 없어요'라고 떳떳하게 적어 낼 수 있는 가정을 만들고 싶지 않으십니까?"로 시작하는 이 캠페인을 후원한 것은 한국도자기였다.

<매일경제>의 보도에 따르면 1983년에 이어 1984년에도 국산차의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다방에서의 국산차 판매 비율이 점차 증가하여 40%에 이르렀고, 매출액은 15% 정도 증가하였다. '우리 것을 찾자'는 사회 전반의 움직임과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가 배경이라는 분석이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정한 단계의 경제 성장 후에 나타나는 건강염려증이 우리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소득 증가가 가져온 각종 육류 섭취의 증가, 이로 인한 각종 성인병에 대한 우려가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교적 익숙한 질병인 고혈압과 당뇨병, 뇌졸중, 낯선 질병으로 등장한 고지혈증과 골다공증 등이 연일 시민들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건강염려증과 탈카페인의 등장

1980년대 한국에서도 커피 원두에서 카페인을 제거해서 만드는 탈카페인(디카페인) 커피가 출시됐다.unsplash

탈카페인커피, 요즘 표현으로 디카페인 커피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 이즈음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일보>의 1984년 10월 31일 자 기사 '탈카페인코피...제맛내기 경쟁'이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에서는 '97% 카페인을 제거한 커피' '커피를 좋아하지만 카페인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커피'로 불리는 탈카페인 커피의 시장점유율이 점차 증가하여 1984년에는 31%에 이르렀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탈카페인커피가 큰 관심을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1982년에 동서식품이 미국의 제너럴푸드사로부터 수입한 원두를 이용하여 '상카'라는 제품명으로 판매를 시작하였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차가운 편이었다. 가격도 맛도 문제였다. 가격은 일반 커피에 비해 30% 정도 비쌌고, 맛은 싱거웠다. 결국 '상카'의 시장 점유율은 0.1%에도 못 미칠 정도로 미미한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나 지금이나 커피 원두에서 카페인을 제거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용매제를 넣어 카페인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1908년에 독일인 루트비히 로젤리우스가 벤젠을 이용해서 특허를 받은 방식을 발명한 것이 시초였다. 벤젠의 유해성이 알려진 이후 메틸아세테이트나 메틸렌클로라이드 등이 사용되고 있으나 역시 유해성 논란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를 보완한 것이 이산화탄소로 카페인을 녹이는 두 번째 공법이다. 이는 시설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어서 시장에서 환영하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방식은 캐나다의 스위스워터(SW)사에서 개발한 방식이다. 커피 생두를 뜨거운 물에 넣고, 생두에 포함된 수용성 물질을 일차로 뽑아낸다. 이렇게 뽑아낸 물질에 함유된 카페인을 활성탄을 이용해 걸러내는 방식이다. 활성탄은 우리가 아는 숯이다. 건강에는 좋지만, 카페인 이외에 커피의 맛과 향을 내는 다양한 성분이 함께 제거되는 것이 단점이다.

<조선일보> 기사는 커피에서 카페인을 제거하는 용매제 사용 방식과 물을 이용한 방식의 장단점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당시 국내 업체 중 하나인 미주산업은 커피에 생약 성분을 가미해서 카페인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중화시키는 '새로운 건강커피'를 개발 중이었다. 동서식품 상카의 경쟁 제품을 개발 중이었다. <조선일보>는 "'카페인이 인체에 미치는 해독을 보해주는' 커피를 개발하여 커피 맛을 변화시키지 않을 작정"이라는 것과 "시험단계는 이미 끝났고, 보사부의 제조 허가가 나오면 내년 중반부터 시판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미주산업이 '쌍떼'라는 이름의 탈카페인 커피 시판을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3년이 지난 1988년 1월이었다. '재계 단신'으로 시판 소식은 전해졌으나 신문 광고조차 없었다. 여전히 탈카페인 커피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커피 속에 들어 있는 카페인 성분이 천식에 효험이 있어서 약이 없을 때 대용품으로 사용하면 좋다는 보도(<동아일보> 1984년 3월 24일 자), 담배를 피울 때 커피를 마시면 커피 속에 들어 있는 카페인이 담배의 니코틴 해독 작용에 도움이 된다는 MIT 보고서 소식(<동아일보> <조선일보> 1984년 6월 20일 자) 등 커피유용론이 더 관심을 끌었다. 카페인에 대한 우려증을 중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미국 등 서구에서의 유행이 무조건 우리나라에서의 유행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노빤다방'에 이어 당시 새로 등장하여 인기를 끌던 이른바 '와프로다방'이 우리나라에 스며들지 않았던 것도 비슷한 사례였다. '와프로다방'은 커피를 마시며 워드프로세서 연습을 할 수 있는 신종 다방이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의 저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1984년 기사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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