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23 17:24최종 업데이트 24.08.2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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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노미야[일본] 교도=연합뉴스) 23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한신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 결승전에서 2-1 승리를 거둔 뒤 한국계 국제학교인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마운드로 몰려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헛스윙 삼진아웃! 교토국제고가 이겼습니다! 106회 고시엔의 승자는 교토국제고입니다!"

한국계 민족학교로 알려진 교토국제고등학교가 8월 23일 열린 제 106회 일본고교야구전국대회(이하 '고시엔') 결승전에서 간토다이이치 고교를 상대로 10회 연장 승부치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로 승리해 고시엔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계 학교가 우승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번 결승전은 여러모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동해 바다 건너서"로 시작되는 한국어 교가도 그랬지만, 고시엔 106년 역사상 처음으로 펼쳐진 동서(도쿄vs.교토) 수도의 대결, 결승전에 오른 두 팀이 한 번도 우승 경험이 없다는 점, 전통의 강호 간토다이이치와 신흥 강호 교토국제고의 신구 대결 등등 이른바 '서사' 측면에서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자타공인 탑티어, 응원석 가득 메운 K물결

(니시노미야[일본]=연합뉴스) 류영석 기자 = 23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한신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일본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고시엔) 결승전 교토국제고와 간토다이이치고 경기. 2-1 승리를 거두고 우승을 차지한 일본 내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 야구부 재학생들이 관중석에서 기쁨을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사실 교토국제고와 간토다이이치고는 전력상 탑티어로 분류되는 강팀이다. 보통 최근 10년 이내 고시엔 본선에 2번 이상 진출했다면 강팀으로 불린다. 고시엔이 철저한 오픈 토너먼트 대회이기 때문이다. 고시엔에 가기 위해선 지역예선을 통과해야 한다. 지역예선에 출전하는 팀은 각 현별로 많게는 130개, 적게는 80여개 팀에 이른다. 일본 전체로 보면 4000여 개팀이 출전하는 셈이다. 지역별 예선을 1등으로 통과한 한 49개팀(도쿄와 홋카이도는 두 팀씩 출전)만이 고시엔 구장의 흙을 밟을 수 있다.

일본 야구만화나 영화에 간혹 등장하는, 고시엔 본선에서 패한 팀 선수들이 운동장의 흙을 주머니에 담는 장면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고교 야구부원들의 소원 역시 고시엔 우승이 아니라 "고시엔에 가고 싶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예선을 통과해 지역대표가 되었다는 것, 그것도 5년에 한 번꼴(10년에 2번)로 통과했다면 자타가 공인하는 강팀, 즉 탑티어로 분류된다.

이런 고시엔 본선 결승전, 전국 4000여 개 학교의 정점에 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47개현 중에 106년 동안 아직도 우승하지 못한 현이 12개나 된다. 일본을 간도, 긴키, 주고쿠, 도호쿠 등등 여덟 개 지역으로 묶는 방식을 빌려서 보더라도 도호쿠 지역은 103년 동안 우승을 못하다가 재작년 센다이이쿠에이 고교가 우승컵을 처음으로 들어올렸다. 이때 이쿠에이가 소속된 미야기현뿐만 아니라 모리오카, 후쿠시마, 야마가타 등 도호쿠 지역으로 분류되는 현들도 마치 자기네 일처럼 기뻐했다.

교토지역만 하더라도 68년만의 우승이다. 1956년 헤이안고교(현 류고쿠다이헤이안고교)가 38회 대회에서 우승한 이래 한 번도 우승기를 가져온 학교가 없었다. 그걸 교토국제고가 해낸 것이다.

교토국제고 고시엔 우승의 순간 ⓒ 박철현


혐한세력 뛰어넘는 '우리 지역 대표' 서사

결승전 관객석을 가득 매운 K(교토국제고의 이니셜)의 물결은 교토국제고 당사자들로는 절대 채워질 수 없다. 교토지역민들이 대거 응원하러 간 것이고, 특히 4강전부터 화제가 됐던 브라스밴드 응원단은 이번 결승전에서도 어김없이 교토산업대부속고가 담당했다. 즉 고시엔 결승전에 진출한다는 것은 개인과 학교의 영광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명예가 걸린 중대한 사건이다.

이건 숫자로도 증명된다. 혹자는 교토국제고가 한국학교이고, 교가도 한국어로 되어 있어 혐한세력의 공격이나 판정차별 등을 우려했지만 이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동서수도대결'과 '우리 지역 대표'라는 서사가 존재한다.

실제로 인터넷으로 결승전 생중계를 한 야후재팬 버추얼이나 주최 측인 아사히신문사의 해당 문자중계 페이지의 응원메시지 분포를 보면 간토다이이치 응원이 60%, 교토국제고 응원이 40%를 차지했다. 도쿄의 인구수를 감안한다면 오히려 교토국제고를 응원하는 비율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아사히신문사의 문자중계 페이지 응원메시지 분포를 보면 간토다이이치 응원이 60%, 교토국제고 응원이 40%(간토다이이치 1827건, 교토국제 1201))를 차지했다. 도쿄의 인구수를 감안한다면 오히려 교토국제고를 응원하는 비율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 아사히신문 문자중계 페이지 캡처


시합의 흐름은 매끄러웠고, 심판판정은 공정했다. 우승 후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가 흘러나올 때 NHK는 "일본어자막은 학교 측에서 제공한 것"이라는 자막을 별도로 달아 논란의 여지를 차단했다. 한국어 교가를 문제 삼는 혐한세력은 물론 있었지만 그들을 반박하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적어도 고시엔에선 한국에서 우려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역으로 그렇기에 바로 '고시엔'인 것이다.

명승부 중의 명승부

무엇보다 이번 결승전은 시합 자체가 명승부 중의 명승부였다. 기자는 일본사립고에서 야구부 매니저를 3년 동안 열심히 했던 큰 딸 때문에 지난 몇 년간 줄곧 고시엔을 봐 왔다. 이번 결승전은 지난 3년은 물론 20년 전까지 범위를 확대하더라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승부였다.

2006년 손수건 왕자로 유명했던 사이토 유키의 와세다실업고와 나중에 뉴욕 양키스에서도 활약한 다나카 마사히로의 도마고마이고의 연장 15회 접전 끝의 무승부, 다음날 펼쳐진 재대결에서 4-3으로 와세다실업고가 승리했을 땐 해당 학교 소재지인 고쿠분지뿐만 아니라 니시도쿄지역 전역이 들썩였다.

이듬해 2007년 사가현 대표 사가기타고등학교의 8회말 역전만루홈런(최종결과 5-4로 승리)은 공립학교 언더독의 반란으로 이후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17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 고시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교토국제고와 간토다이이치가 선보였다.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니 관심 있는 독자들은 꼭 하이라이트를 챙겨보길 바란다.

폐교 위기 학교의 부활

(니시노미야[일본] 교도=연합뉴스) 한국계 국제학교인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23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 한신고시엔구장에서 우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교토국제고는 이날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 결승전에서 간토다이이치고를 2-1로 물리쳤다. ⓒ 연합뉴스


아무튼 감히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고시엔 우승'이라는, 일본의 모든 고교야구소년들이 꿈꾸는 결실을 교토국제고가 이뤄냈다. 1990년대 학생수 급감으로 폐교 위기까지 몰렸던 학교가 1999년 야구부 창단을 계기로 부활했다. 물론 야구부원들은 일본 전역에서 온 일본국적자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어 교가를 거리낌 없이 부르며 교토국제고 소속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야구부원이 아닌 일본국적 학생들 역시 한국에 대한 애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인근 학교는 운동장은 물론 응원단마저 빌려줄 정도로 지역사회에서 그들이 가지는 위상은 대단하다. 재일동포들 역시 민단계, 총련계라는 이념적 차이를 제쳐두고 한마음 한뜻으로 아이들을 응원했다. 전국에서 버스를 대절해 1000여 명이 넘는 재일동포들이 결승전에 몰렸고, 기부금 문의가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이제 그들이 교토로 돌아가면 지역 차원의 성대한 환영식이 펼쳐질 것이다. 그 환영식에 국적 같은 건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다. 교토국제고 야구부는 이제부터 다시 시작한다. 무려 '고시엔 우승팀'이라는 타이틀 홀더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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