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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오전 현장검증을 가기 위해 마산동부경찰서를 나오는 이아무개씨.
ⓒ 오마이뉴스 윤성효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는 보도를 보는 순간 내 머리속에서 이 속담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25년 전의 일이다. 가까운 친척 하나가 한 밤중에 술이 잔뜩 취해서 우리 집을 찾아왔었다. 오지도 않은 자기 마누라를 당장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는데 우리 집 방들을 다 뒤져보고도 막무가내였다. 제 어머니뻘인 우리 어머니에게까지 욕설을 퍼붓고 베개를 던져서 전등을 깨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자 나를 죽이겠다고 덤비는 바람에 나는 자던 옷차림에 맨발로 뛰어나와 이웃집에 숨었다.

그때 그가 우리 세 모녀에게 칼이라도 들이댔더라면?

나를 구하기 위해 완력에 술기운까지 더해진 남자를 붙잡고 늘어지던 어머니와 언니 걱정으로 여대생으로서 이웃에 창피하다는 생각은 뒷전이었다. 경찰이 올까봐 두려웠는지 그는 자진해서 물러갔다. 놀란 가슴을 서로 진정시키고 난동의 현장을 정리하면서 경찰이 오면 미안해서 어쩌나 했는데 경찰은 끝내 오지 않았다.

만약 그때 그 친척이 우리 세 모녀에게 칼이라도 들이댔더라면? 경찰도, 이웃도, 세상 어디에도 구조를 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땠을까. 나는 아마 그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기 위해. 어머니와 언니를 살리기 위해 ‘순간적’으로 그랬을 지도 모를 일이다. 폭력의 피해란 그런 것이다.

그 아내 역시 ‘순간적’으로 남편을 죽였노라고 했다. 2시간 가량 각목으로 구타를 당한 그 날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는 말에 11년 세월을 폭력과 의처증에 시달리며 잘 참고 살아오다가 왜 갑자기 그랬냐고 물을 만큼 잔인한 사람이 있을까. ‘아이들을 위해 그랬다’는 그이의 말에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아비가 있어야 하지 않으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아비 됨’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아비의 존재 의미는 자녀의 행복에 있다. 어머니를 피 흘리게 하고 가정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아비의 존재가 자녀에게 행인지 불행인지를 굳이 답해 주어야 할까.

그 아내인들 이혼할 생각을 왜 안 했겠는가. 처음에는 아이들이 생기면 나아지겠지 참는다. 다음에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 키우지 않기 위해 참고 산다. 그러다가 아이들을 위해서는 오히려 이혼해야겠다는 판단이 든다.

그러나 그런 남자일수록 합의이혼을 해주지 않을 테니 이혼도 쉽지 않다. 재판이혼을 청구할 수 있지만 그러는 동안 한 집에 살면서 당할 일은 더욱 끔찍하다. 그 모든 고통을 견뎌내고 이혼이 된다 해도 그것이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여자들은 안다. 아이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완전히 무관한 관계가 될 수 없는데다가 폭력적인 남자들은 ‘법적 관계’ 여부를 따져서 제 행동을 자제할 만큼 이성적이지 못하다.

의처증까지 있는 폭력남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은 ‘너는 절대로 내 손에서 못 벗어난다. 지구 끝까지 찾아내서 가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이다. 이건 말뿐이 아니다. 실제로 친정은 물론 친한 친구, 돕는 이웃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그 말을 현실화한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내와 아이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위축되고 무력화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내가 살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그것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러므로 내가 혼자 당하고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내가 죽기 전에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저 아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을 수도 없다.“

매 맞는 여성들은 어쩜 그렇게 똑같은 답안을 갖고 사는지...

▲ 11일 새벽 남편을 살해하기 전 각목 등으로 맞아 이씨가 흘렸던 피가 수건과 이불에 묻어 있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10여 년간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상담하면서 어쩌면 여자들이 이토록 똑같은 답안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이래도 여성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할 것인가 가슴을 친 적이 많다.

“경찰에 신고하지 그랬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가정폭력을 신고해 본 적 있냐고 묻고 싶다. 상담소장으로서 가정폭력 사건의 중재자가 되기 위해 심야에 여러 번 경찰서에 가보았다. 우선 경찰은 가정폭력사건을 매우 난감해한다. ‘부부문제라는 게 다음날 화해하면 우리만 우스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핑계이다.

일반 폭력사범의 경우도 다음날 당사자끼리 합의보고 화해하지 않는가. 경찰의 역할이란 어차피 그 전까지 공권력으로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닌가. 핵심은 가정 폭력이 폭력범죄라는 개념이 분명히 머리속에 박혀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가정폭력방지법이 만들어진 지 꽤 되었지만 법을 집행할 의지가 없는데 무슨 소용인가. 의지가 없으니 대응도 미숙할 수밖에. 상담현장활동가들이 경찰 요로에 또 행정부서에 ‘경찰교육강화’를 요구해 온 게 어제오늘이 아닌건만, 달라지는 기미가 전혀 없으니 문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격이니, 나라고 해도 경찰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폭력의 고통을 당해본 다음이 아니고는 그 아내의 죄과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가해자를 어른이 되어 살해한 김부남씨는 ‘나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고 절규했다. 그 아내에게 살인자라고 남편을 죽인 나쁜 여자라고 중형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이 그토록 인권을 소중히 여긴다면 지금 이 순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길 만큼 고통스런 순간을 맞고 있고, 그것이 반복되는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겠지’,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야’, ‘여자 하나 참으면 집안이 조용할텐데’ 그 아내의 귀에 들려오는 세상의 목소리는 이랬다. 죽을 수 없기에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 아내에게는 가정폭력에 무관심한 사회, 벗어날 길이 없다는 좌절을 심어준 세상이 진짜 살인자가 아닐가. 그렇다면 우리모두가 공범이다. 최소한 살인 방조죄를 면키 어렵다.

출산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것이 개별가정의 개인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노동력과 경쟁력의 문제라고 인센티브를 개발하고 나서서 홍보하고 계도하던 국가가 왜 가정폭력문제는 가정에 위임한 채 이토록 침묵하는 것인지. 언제까지 ‘고양이’를 물고 살인죄를 뒤집어 써야하는 ‘쥐’들을 반복생산해 낼 것인지. 어머니의 의무와 자녀양육의 중요성은 강조하면서 어머니의 권리, 아니 최소한의 신변안위조차 책임져주지 못한다면 정말 무능한 국가가 아닌지. 어떤 못된 남자 만날까 딸 낳아 결혼시키기 겁나니 출산률이 높아지긴 애저녁에 그른 게 아닌지. 내 머리 속에서는 냉소적인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지금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희생되는 여성과 아이들은 적지 않은 숫자이다. 언론에 사건으로 보도된 것은 빙산의 일각이요, 지뢰밭에서 지뢰 하나 터진 격이다. 가정폭력의 심각성은 그 후유증이 사회적으로 확산된다는 데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경찰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하는 표창원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가정 폭력은 가장 무서운 근저범죄이다. 범죄자들의 성장과정을 보면 그들 자신이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유영철도 가정폭력을 피해 어머니가 가출하자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여성일반에 대한 적개심이 되면서 끔찍한 연쇄 살인을 불렀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나올 만큼 세계가 폭력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학원폭력, 사회폭력, 상업적 매체들의 폭력 미화 분위기까지 나날이 폭력에 심해지면서 불감증이 나타나고 있다.

가정폭력, 국가는 왜 외면하나

가정폭력의 근절없이는 폭력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 국가가 나서야 한다. 개선의지만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예비군/민방위 교육에서 남자들에게 가정폭력이 이제는 범죄라는 사실을 교육시키고, 국민에게 간첩 신고를 장려했듯이 가정폭력범을 신고하게 하고 가정폭력은 가중처벌을 하고(살인죄도 직계존비속에 대해서는 더 무겁게 벌을 하듯이 사랑하고 보호해야할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한 죄는 더 크게 벌해야 할 것이다) 의처증과 알콜중독에 걸린 가해자들을 격리시켜 치료하는 등 당장 떠오르는 일만 해도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정당방위적’ 살인은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놔두고 나가기 보다, 아이들을 위해서 아비를 죽인 어머니, 즉각적인 자수로써 살인자의 멍에를 순순히 진 그 여성을 ‘어머니의 용기’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떠들썩했어도 사흘이면 잊는 법, 형사상의 벌을 떠나 어머니와 두 딸은 일평생 그 상처와 짐을 고스란히 떠메고 가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동냥은 못 줄 망정 쪽박을 깨는 일’만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텐데, 가슴이 아프면서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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