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에어컨 등 냉난방기를 생산하는 업체인 (주)캐리어(대표이사 토마스 E. 데이비스·광주 하남공단 소재)가 그 동안 하청업체와 형식적인 도급계약을 맺은 채 실제로는 노골적인 불법파견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수많은 제조업체들이 도급계약을 가장한 채, 인력업체로부터 노동자를 공급받아 직접 생산라인에 투입하면서 직접 작업지시를 내리는 불법파견이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그 동안의 노동계 주장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것이어서 앞으로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거짓투성이 도급계약...명백한 불법파견

28일 캐리어사내하청노조(위원장 이경석)에 따르면, (주)캐리어는 청우, 대명실업, 명신실업, 광진실업, 캐리어냉열, 한보산업개발 등 6개 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체결하고 있지만 동일한 작업라인에 정규직 노동자와 여러 개의 하청업체 노동자를 뒤섞어 배치한 뒤, 정규직 조반장이 모든 작업지시를 일괄적으로 내리고 잔업, 특근 명령에서 근태관리까지 일체의 통제권한을 직접적으로 행사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더구나 주야간 근무조 교대시에도 동일한 업무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에게 번갈아 맡도록 하는가 하면, 소속 업체가 서로 다른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동일한 업무를 교대해온 것으로 밝혀져 불법파견이 노골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민법상 '도급계약'은 일의 완성을 목적으로 체결되는 계약으로, 도급업체가 특정한 라인이나 특정한 기계를 맡아 일정한 물량이나 정해진 기간 동안 생산을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작업지시나 근태관리 등은 도급계약을 맺은 하청업체 관리자가 담당해야 한다. 

이때 원청업체가 이같은 작업지시나 근태관리를 담당할 경우에는 단순히 노무를 제공받는 파견근로 계약이 성립되는데, 현행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파견법)에서는 제조업의 직접 생산공정에 대한 파견근로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계약에 해당된다. 

[증거 1] 정규직 조장이 3-4개 하청업체 노동자들 모두 관리

▲ [그림1] (주)캐리어 가공3교대 인원현황 ⓒ 이정희

(주)캐리어측이 작성한 '가공3교대 인원현황(그림 1)'이라는 자료에는 생산라인의 인원배치 현황이 잘 나타나 있다. 조장, 반장, 기장으로 이뤄지는 현장 작업조직은 각 조별로 정규직 조장이 4-5명의 정규직 사원과 2-4명의 하청업체 직원들을 관리하는 형태로 짜여져 있다(그림에서 붉은 색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하청업체 직원들이다).

이를 확대한 원 안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사람의 이름 왼쪽에 표시된 숫자는 정규직의 사원번호이고 업체 이름이 표시된 것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이다.

A-BRG조의 경우 오전반은 조장은 정규직인 배모씨이고, 조원은 정규직 사원 5명 외에 조00(명신), 이00(한보), 이석0(한보), 김00(캐리어냉열)씨 등 각각 소속업체가 다른 4명의 하청노동자로 구성돼 있다.  

아래쪽에 있는 오후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정규직 조00씨가 조장을 맡고 정규직 6명과 냉열, 청우, 한보 등의 업체 소속 하청노동자 3명이 일을 하고 있다. 정규직 이00씨가 조장을 맡고 있는 야간반 역시 정규직 6명과 청우 소속 2명, 명신 소속 1명 등 3명의 하청노동자가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이는 A-CY라인, A-VN라인, B-SE/BRG라인, B-CE/VE/RE라인 등 모든 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조반 체계가 현장 작업조직의 최소단위임을 감안할 때 이같은 사실만으로도 도급계약의 정상적인 이행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충분히 예견된다.

[증거 2] 하청업체 업무구분 전혀 없어...라인내 위치 따라 업무 결정돼

▲ [그림 2] 인도어 공정 라인의 작업흐름. 같은 공정라인인데도 정규직과 각기 다른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뒤섞여 있으며, 정규직 사원인 조반장은 정규직과 하청노동자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작업지시를 내린다. ⓒ 이정희

실제로 각 라인에서 진행되는 작업공정을 살펴보면, 불법파견의 증거는 더욱 명백해진다. 에어컨 외관을 만드는 I/D1(인도어 라인, 그림 2)의 작업흐름은 부품 투입에서 적재까지 모두 24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일관작업 공정의 특성상 모든 작업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으며, 작업지시는 팀장 한 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 라인의 팀장은 (주)캐리어의 정규직 사원인 정00씨가 맡고 있는데, 하청업체인 한보 소속의 서00씨가 부품재료를 투입하면, 바로 옆에 있는 정규직 사원 임00씨가 블라우어 작업을 하고, 그 다음으로 광진 소속의 안00씨가 EVA 작업을, D/P 작업은 한보 김00씨가 담당한다. 또 광진의 이00씨가 센서작업을 끝내면 캐리어냉열 소속 김00씨가 접지작업을 추가하고 한보 최00씨가 LEAK검사를 하고 조립공정으로 넘긴다.  

같은 공정라인인데도 정규직과 각기 다른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뒤섞여 있으며, 정규직 사원인 조반장은 정규직과 하청노동자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작업지시를 내린다.

조립공정 역시 여러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섞여서 작업을 하긴 마찬가지다. F/G 조립은 한보 김00씨가, T/B 작업은 한보 이00씨, 이어진 P/D 작업은 명신 고00씨가 하고, BOX작업은 명신 송00씨와 한보 선00씨가 담당하고 있다. 이것은 하청업체별로 담당하는 업무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업무성격도 소속 업체가 아닌 라인 내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증거 3] 특정 기계도 전담업체 없어...정규직, 비정규직 구분도 무의미

▲ F1 공장 라인 흐름도 ⓒ 이정희

이와 함께 교대근무에 따라 작업자가 바뀔 때에도 소속 하청업체가 모두 다른 것으로 밝혀져, 도급계약의 일관성이 전혀 유지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운 공기를 냉매를 이용해 차게 만드는 에어컨의 핵심부품인 콤프레셔를 만드는 F1 공장 가공 A-SHOP SH 라인(그림3)을 보자. 

이 작업라인의 경우 정밀기계를 이용해 개인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이것을 전체적으로 연결하는 형태로 라인이 구성돼 있는데, 11개로 나뉘어지는 작업 중에서 하청 노동자가 투입되는 곳은 #20과 #90, #110 등 모두 세 곳이다. 

그런데 #20의 경우 오전과 야간에는 정규직 사원이 투입되고 오후에만 사내하청 노동자가 작업을 담당한다. #90과 #110의 경우에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교대로 작업을 하는데, 소속 업체는 매번 달라지는 것으로 돼 있다. #90은 오전반은 명신 조00씨가, 오후반은 한보 강00씨가, 야간반은 청우 정00씨가 맡고 있으며, #110 공정 역시 오전반은 캐리어냉열 박00씨가, 오후반은 청우 양00씨가 담당하고 있다.

즉, 특정한 기계에 대해서도 이를 담당하는 하청업체가 구분되지 않는 것은 물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이다.

[증거 4] 노조원 진술서, 불법파견 증거들과 정확하게 일치

이같은 불법파견은 사내하청 노조원들이 작성한 진술서를 통해 확실하게 그 정체를 드러낸다. 이 진술서는 해당 노동자에게 작업지시를 내리는 사람과, 잔업 특근을 명하는 사람, 출석여부와 근태를 체크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도록 돼 있다.

명신 소속 김00씨는 작업지시를 내리는 사람, 잔업·특근을 명하는 사람, 출석여부와 근태사항을 체크하는 사람 모두 정규직 사원인 부조장 이00씨라고 적었고, 캐리어냉열 소속 고00씨와 광진 소속 김00 역시 정규직 사원 조장 오00씨와 박00씨로부터 모든 지시명령을 받는다고 대답했다. 

진술서를 제출한 하청노동자 전원이 하청업체 관리자가 아니라 캐리어의 정규직 사원들이 지휘 감독업무를 맡는다고 진술했다. 또 작업을 할 때 옆 사람의 이름과 소속 업체를 적으라는 문항에 대해서는 청우 소속 이00씨와 김00씨는 다른 업체 소속인 대명 최00씨와 한보 송00씨 라고 써냈고, 광진의 김00씨는 청우 이00씨를, 대명의 이00씨는 광진의 김00씨를 각각 적었다.

모든 것들이 앞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불법파견의 실상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광주지방노동청 5월중 실태조사 계획...불법파견 판정여부 주목

이같은 정황과 증거들로 미뤄볼 때 (주)캐리어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들은 도급계약에 따른 근로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사용사업주의 지휘명령을 받아 사용사업주를 위한 근로에 종사하는" 파견근로에 종사해 온 것이 분명해지며, 이는 '제조업의 직접 생산 공정업무'에 대한 파견근로를 금지하고 있는 현행 법률에 전면 위배되는 행위이다. 

이에 대해 (주)캐리어 사측 관계자는 "우리는 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맺고, 하청근로자들은 하청업체와 근로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파견근로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일축하고 있지만, 하청업체들은 물론 (주)캐리어 모두 현행법상 처벌을 벗어나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현행 파견법에 따르면, 형식상 도급계약을 맺고 불법파견업을 해 왔던 하청업체들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 벌금과 영업정지 명령을, (주)캐리어와 같이 법 규정에 위반된 근로자파견을 사용한 업체는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관련, 노조는 지난 3일 광주지방노동청에 (주)캐리어와 6개 하청업체를 상대로 불법파견에 관한 진정을 제기했고, 노동청은 오는 5월 3~4일에는 하청업체를 대상으로, 10일에은 (주)캐리어를 상대로 진상조사를 벌여 불법파견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다.

(주)캐리어와 동일한 방법으로 (주)인사이트코리아와 형식상의 도급계약을 맺고 노동자를 공급받아온 SK(주)에 대해 서울지방노동청이 '불법파견' 판정을 내리면서, 하청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할 것을 명령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주)캐리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결정이 내려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주)캐리어의 사례는 제조업에서의 불법파견을 둘러싼 무수한 논란들을 제대로 바로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