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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은어처럼 싱싱하게 뛰놀던 <평화를 여는 마을>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끝났습니다. 여름과 어깨동무하고 신나게 논 덕분에 햇빛에 시커멓게 그을린 아이들이 방학과제물을 챙겨들고 우르르 마을을 나섭니다.

남매인 혜진(경남하동초6년)·원진(〃4년), 철홍(〃4년)·아름(〃3년), 사촌인 경근(〃2년)·경범(〃1년) 지훈(〃5년), 하나(〃1년) 등 8명은 갑종 씨의 봉고차를 타고 섬진교 다리 건너 하동초등학교에 갑니다.

형제인 세현(전남광양다압초6년)·세원(〃5년), 승규(〃6년)·완규(〃4년), 승(〃6년)·솔(〃3년), 진규(〃4년), 지연(〃1년) 인정(〃1년) 등 9명은 교육청 통학버스를 타고 20여분 거리인 섬진강 변 다압초등학교에 갑니다.

평화마을이 들어선 지 딱 일 년을 맞는 9월 1일의 등교 표정입니다. 망국병(亡國病)인 영호남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의도로 양도의 접경지역인 섬진강 변에 세워진 <평화를 여는 마을>은 마을 이름과 취지와는 딴판으로 일 년을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따로 나뉘어 등교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주민들은 지난 일 년 동안 지역감정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혀 갈등과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전남·경남지역 각각 16가정씩 모두 32가정이 모여 사는 <평화를 여는 마을>, 가난과 세상 풍파에 시달린 120여명의 주민들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실직과 병고, 술과 고성, 갈등과 싸움이 잦았던 지난 일 년을 간략히 이야기할까 합니다.

지난 6월경 평화마을 자치위원회 임원들이 총 사퇴를 했습니다. 잦은 시비와 음해에 시달리던 마을대표 진규 아빠 등 집행부 임원들이 마을 운영에 한계를 인정하고 물러났던 것입니다.

결정적인 사퇴 원인은 10년째 동거중인 을용·점순 씨 부부의 결혼식이었습니다.

결혼 축하 차 마을을 방문한 두 분의 헤비타트 간사께서 축의금의 일부를 자치위원회 운영기금으로 기부하는 과정에서 '축의금을 떼어먹었다'는 음해가 불거졌습니다. 정치권뿐 아니라 작은 마을에도 지역감정을 악용해 음해하고 싸움을 부추기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야이! 개××들아, 내 돈 내놔. 내 돈 내놔."

신혼여행을 다녀온 을용 씨가 만취된 상태로 마을을 휘저었습니다. 밤늦게 귀가한 저는 느닷없이 멱살을 잡혔고, 마을대표인 진규 아빠는 웃통을 벗었습니다. 부녀회 총무인 고니 엄마는 파출소에서 화가 치밀면서 지병이 도졌고, 싸움을 말리던 홍보위원 세원이 엄마는 흉기에 위협 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흉기까지 등장한 '축의금 사건'은 끝내 경찰서로까지 문제가 커졌습니다. 흉기에 위협 당한 세원이 엄마는 혼자된 여자라고 무시당했다며 합의를 못해주겠다고 했고 을용 씨는 뒤늦게 통사정을 했습니다.

자신이 당한 끔찍함보다 이웃으로 살아갈 앞 날을 고려한 세원이 엄마는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면서 을용 씨 부부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당신보다, 뒤에 숨어 싸움을 부치기는 사람이 더 나빠요. 제발 그런 사람의 말에 속지도 말고, 경상도니 전라도니 하며 감정을 부추기는 말에 속지 말아요. 한 마을에 사는 사람끼리 이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

묘하게도 주민들이 직접 뽑은 자치회, 부녀회 대표를 비롯한 임원들이 대개 전남출신이었습니다. 이 같은 구성에 불만을 품은 경남 출신 주민들은 '씨앗회'를 만들었고, 술자리를 매개로 이뤄진 모임 자리의 주요한 화제는 집행부 성토였다고 합니다.

총무를 사퇴한 저는 왜 정치권, 검찰 등의 인사에서 지역안배를 따지는지 실감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파동에 의해 마을의 지역감정은 더욱 견고해졌고 부녀회는 해체되다시피 했습니다. 어떻게 극복해야 좋을지 몰라 냉각기간을 갖고 사는데, 이웃끼리 소닭보듯이 하는 처지가 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난 일 년은 힘들었습니다. 아름답게 흐르는 섬진강도 수려한 가을 백운산도 어쩌지 못하고 지켜 본 세월이었습니다.

만호 형님네는 고부갈등으로 어머니가 가출하는 등 불화가 잦고, 지연이 할머니는 남편 병간호와 큰아들의 실직 때문에 한숨소리가 높고, 객지로 일 찾아 떠난 승덕 씨네 고등학생 아들마저 광양에 자취하면서 집안이 썰렁합니다.

신앙 또는 이념 등의 동질성이 개입돼도 공동체 형성은 쉽지 않은 법인데, 별다른 준비 없이 좋은 생각만으로 만들어진 저희 마을이 빠른 시일 내 공동체로 정착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림 속의 떡은 보기 좋은데 먹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떠 올려 봅니다.

지역감정이란 비겁한 망령이 숨어 있다가 때가 되면 또아리를 트는 <평화를 여는 마을>, '전라도, 경상도' 트집으로 상처를 입고 입히는 불행한 갈등이 언제 끝나고 언제 평화가 열려서 화해가 강물처럼 흐를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지난 일 년을 갔고, 또 다시 일 년이 올 것입니다. 그 일 년 뒤에는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 다만, 사랑하고 나눔으로 옥신각신하다 어떻게 일 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는 고백을 하고 싶은 열망으로 내년 가을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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