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 독일의 헬무트 콜 수상이 방한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9월 프랑스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찾았습니다. 유럽의 두 나라 국빈이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누가 뭐래도 그 해의 고속철도 기종 선정과 관련 지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헬무트 콜 독일 수상은 방한에 맞추어 서울 무역센터 앞에서 고속철도 전시회까지 열어 방문 목적이 고속철도 선정을 위한 것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선정된 다음 방문을 하긴 했지만, 떼제베 선정에 대한 답례성 방문이라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이념보다 실리가 우선인 외교현실에서 이처럼 일국의 대통령이 다른 나라의 대형 사업을 따내기 위해 세일즈맨을 자처하는 일은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경제문제와 외교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때일수록 대형 국책사업의 공정하고 투명한 진행이 그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할 것입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후보에 들었다가 탈락한 국가와의 외교마찰까지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고속철도 기종 선정 이후 불거진 프랑스 알스톰사의 로비의혹 보도를 접하면서,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국책 사업에서조차 로비와 비리가 끼어들 만큼 우리 사회의 후진성에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 달 중순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국정홍보처의 발표에 의하면, “한·미 동맹관계 공고화와 대북정책 공조 강화, 테러사태 이후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 과정에서의 협력방안 등 양국간 공동 관심사에 관하여 협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국정홍보처의 발표를 곧이 곧대로 믿고 싶습니다. 한미 양국의 정상이 위에 발표한 내용에 대한 협의만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테러 전쟁의 와중에서도 한국을 찾아 오는 이유가 3월로 예정된 한국군의 차기 전투기 선정에 압력을 넣기 위함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군의 차세대전투기 사업에 끼지 못해 이젠 생산이 중단될지도 모르는 보잉사의 전투기 세일즈를 위해 미국의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전투기 평가 기준이 사실상 미국에 유리하게 바뀐 일이나, 일부 언론이 ‘한미 동맹’을 내세우며 바람몰이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면서 이번에도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합니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여러 외교통로를 통해 오만한 자세로 압력을 가하는 미국이나, 그 앞에서 언제나 약자의 모습을 보이는 우리 정부에 대한 서글픔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나라가 외교적 압력이나 뒷거래를 통한 로비가 통하는 곳으로 국제사회에 인식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한국이 제품의 성능이나 가격, 기술 이전 여부보다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국책사업 선정에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나라로 인식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미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이번 사업을 따내기 위해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프랑스와 러시아의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찾지 않은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할까 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고속철도 사업이나, 비리로 얼룩진 율곡사업 때보다는 상당히 공개된 상태에서 선정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갖게 합니다.
이번 차세대 전투기 선정 사업만큼은 다른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공정하고 투명한 사업 진행만이 그 누구의 압력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국방부의 선정기준에 어느 기종이 가장 적합한 지에 대한 의견은 누구나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보잉사의 F-15K가 선정되더라도 그것이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방부 자체 판단에 의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면 거기에 시비를 걸 생각도 없습니다. 선정과정의 공정함과 투명함이 보장되어 모든 이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결과를 내놓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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