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동구 매석동 2-23번지, 바다 건너 율도 서인천 화력발전소가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기초소재(주).
회사에는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끔 시설보수를 위해 투입된 외부 용역 업체 사람들이 황량하게 보이는 공장을 오고 갈 뿐이다. 모든 전자시스템의 계기들은 '0(제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회사는 시멘트에 섞어 쓰는 슬래그 분말 제조업체로 국내 최대 레미콘업체인 E 레미콘사가 최대 주주로 있는 중소기업 규모의 회사다. 하지만 시멘트의 대체재로 활용가치가 높은 슬래그 분말에 의해 시장이 잠식당할 것을 우려한 국내 시멘트 제조 7개 사의 '폐업' 요구로 회사는 지난달 29일부터 모든 생산과 판매가 중단된 상태다.
6월 2일 월요일 오후 4시 기초소재 공장 출하실. 이곳은 기초소재가 만드는 모든 제품의 출하 및 차량을 관리하는 곳이다. 여느 때 같았으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돌아가고 있을 9개의 출하라인은 모두 멈춰서 있다.
이 곳만이 아니었다. 모든 생산 과정을 자동으로 컨트롤하는 운전실의 감시 카메라들도 작동을 멈춘 지 오래다. 슬래그 분말의 원료가 되는 슬래그와 석고의 비율을 일정하게 맞춰주는 정량공급기도 '0'톤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공장이 돌아가지 않다 보니 원료 보관소는 물론이고 하역장까지 가득 메운 3만톤의 슬래그 더미는 인적 없는 공장의 을씨년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멘트 업계가 담합해 모회사인 B레미콘 사에 시멘트 공급을 중단해 현재까지 680억 원의 매출손실을 입힌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정말 황당하고 억울합니다."
2년 전 공장이 최초 가동될 때부터 공장장으로 재직하고 있다는 윤아무개씨의 말이다. 그는 이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토로했다.
윤 공장장은 "IMF 때 기존 시멘트 업계의 구조조정에 의해 쫓겨난 직원들과 합심해 이제야 자리를 잡고 정상궤도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문을 닫게 될 줄을 몰랐다"면서 "그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회사를 위해 헌신해 준 직원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시멘트 수입 잠재력 갖춘 '기초소재(주)'
기초소재는 1999년 9월 법인을 설립해, 2001년 1월부터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한 신생 기업이다. 하지만 지난해 매출 523억1700만원에 당기순이익이 109억원에 이르는 알토란 같은 회사다.
특히 기초소재가 위치한 곳은 부두를 끼고 '사이로'(대형 시멘트 저장소)가 건설되어 있어 항만 시설만 갖춘다면 쌍용, 동양, 한라 등 국내 시멘트 3사가 독점하고 있는 시멘트 수입시장에 언제든 뛰어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시멘트 업계의 표적이 돼왔다.
"시멘트 7개 사가 B레미콘 회사에게 기초소재의 완전 폐업뿐 아니라, 인천 북항 개발 계획 백지화까지 요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죠."
이 회사 기술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김아무개 박사는 국내에서 독점적 위치를 구축한 시멘트 7개 사가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현 시멘트 시장에서 1% 정도 차지하고 있는 기초소재를 견제하는 내막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기초소재가 위치한 만석부두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정박시설이 갖춰있지 않아 대형 화물선은 입항을 할 수 없다. 또 이곳에 정박시설을 갖추려면 공사기간만 2년이 넘게 걸리게 때문에 국내 시멘트 업계 몰래 항만을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김 박사의 설명이다.
또 순수 골재 도입을 목적으로 참여하려던 인천 북항 개발도 시멘트업계에서는 수입기지 구축 의도로 바라보고 있지만, 이미 국내 3대 메이저 시멘트 회사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다국적 외국 자본 라파즈에 의해 전세계 시멘트 시장이 잠식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허락 없이 수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
▲ 슬래그 분말의 원료가 되는 슬래그와 석고의 비율을 일정하게 맞춰주는 정량공급기가 '0'톤을 가리키고 있다. 이 정량공급기는 5일째 멈춰서 있다.ⓒ 오마이뉴스 공희정 |
'억울하게 파편 맞은' 운송 차량 차주들
기초소재의 직원 수는 66명, 그러나 이 중에서 생산직은 15명에 불과할 정도로 공장은 완전자동화가 되어 있지만 이들은 타의에 의해 일손을 놓아야 했다. 하지만 갑자기 실업자가 된 것은 이들뿐이 아니다. 그 동안 기초소재에서 나온 슬래그 분말을 운반해 온 50여 수송차량의 차주들도 반실업자 상태에 놓이게 됐다.
이들 차주들이 운행하는 25톤짜리 벌크트레일러는 슬래그 분말뿐 아니라 시멘트 등도 운송할 수 있지만, 시멘트 회사들은 이들이 E 레미콘 회사와 기초소재를 위해 일한다는 이유로 일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1년 전부터 기초소재를 위해 일했다는 김 아무개씨는 "주요 시멘트 회사들이 기초소재 제품을 운송할 경우 다른 일을 주지 않는다고 협박해 몇몇 차주들은 아예 이곳을 상대하지도 않는다"면서 "우리의 생계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우리가 파편을 맞아야 하냐"고 목소리 높였다.
김씨는 "5일째 아무 것도 못하고 차를 놀리고 있다"고 한숨을 내쉰 뒤, 이내 자신이 1년 전 새로 구입했다는 신형 벌크트레일러를 몰고 공장을 빠져나갔다.
이날도 출하물을 실지 못한 10여대의 운송차량들이 텅빈 주차장을 채우고 있었다. 무덥고 나른한 오후, 사라지는 김씨의 트레일러 뒤로 기초소재의 대형 '사이로'에 붙어있는 '에너지 절약! 우리 모두의 약속입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옅은 소금기가 묻혀있는 실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