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레미콘업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B레미콘사를 운영하고 있는 유 아무개 사장. 그는 몇 달 전 D시멘트사의 A사장을 찾아갔다. A사장을 찾아간 목적은 시멘트를 예정대로 공급해 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 사장은 당시 A사장으로부터 시멘트 공급 거절과 함께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요지는 이렇다.
"우리(시멘트업계)는 우리 업계를 위협하는 경쟁상품이나 대체.보완상품 등 그 어떠한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당신네 회사에 하는 행위가 위법이라는 것을 안다. 설사 공정거래위원회가 시정명령을 내고, 과징금 수천억원을 물더라도 (시멘트공급 중단은) 계속될 것이다."
유 사장이 운영하는 B레미콘사는 지난 3월부터 시멘트업체들이 일제히 시멘트 공급을 줄이는 바람에 수백억원대의 손실을 보고 있다. 레미콘 업체의 특성상 원재료인 시멘트를 공급받지 못하면 공장을 가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멘트 회사들이 레미콘업체인 B사에 시멘트 공급을 줄이고 있는 이유는 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B사가 시멘트에 섞어 쓰는 '슬래그 분말'을 생산하는 업체인 G사의 대주주이기 때문이다. (* '슬래그'는 포스코의 제철과정에서 발생하는 철강부산물로, 예전에는 쓰레기 취급을 받아 바다에 매립물로 쓰였으나 현재는 시멘트 대체제로 활용됨... 관련 <상자기사> 참조)
| | | 슬래그란... | | | | 슬래그는 철강 제조과정에서 나오는 암석 성분으로 과거에는 폐기물 쓰레기로 취급받아 왔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것을 갈아 가루형태로 만든 ‘슬래그 분말’이 시멘트와 섞어 사용되면서 시멘트와 같거나 그 이상의 성능을 가진 재료로 알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레미콘 1평방미터를 만들기 위해선 330킬로그램의 시멘트가 필요하지만, 슬래그 분말을 사용할 경우 250킬로그램의 시멘트만 있어도 레미콘을 만들 수 있다. 80킬로그램의 시멘트를 줄일 수 있는 셈이다.
이같은 시멘트 감소 효과는 자원 재활용이나 에너지 절감, 이산화탄소 감소에 따른 지구 온난화 방지 등 사회,환경적인 측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1992년 바젤협약에서 인체에 해가 없고 환경적인 제품으로 인정받았다. 국내에서는 시멘트 업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한국표준규격(KS)에 포함됐다.
또 슬래그 분말 가격이 시멘트보다 훨씬 싸기 때문에 원가 절감 차원에서도 최근 들어 레미콘 업계에서는 큰 인기를 끌었다. 선진국에서는 레미콘 제조과정에서 슬래그 분말 사용 비율이 20%에 달할 정도로 높다.
국내 슬래그 제조업체들은 포스코로부터 슬래그를 사들여 제조를 해왔다.
포스코의 한 관계자는 "예전에는 슬래그를 쓰레기 취급해 바다에 매립하기도 했는데 시멘트대체제로 사용되면서 오히려 돈을 주고 슬래그를 팔았다"면서 "슬래그의 활용은 환경을 보존하고 경제적 활용도를 높이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 김종철 기자 | | | | |
G사는 슬래그 분말을 레미콘 업체들을 상대로 판매해왔다. 레미콘 업체들은 시멘트보다 환경친화적이고 가격도 훨씬 싼 슬래그 분말 사용을 선호해왔다. 따라서 G사가 분말을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레미콘 업체들의 시멘트 사용량이 줄어들고, 이는 곧 시멘트 업계의 수입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회사 문 닫아야 시멘트 내준다"
시멘트 업체들의 B레미콘사에 대한 압박은 올 들어 본격화됐다. B사가 대주주로 있는 G사가 생산하는 '슬래그 분말'이 레미콘 업체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자 시멘트 업체들의 위기감이 팽배해진 것이다.
B레미콘사를 압박하고 나선 곳은 국내 11개 시멘트 업체를 회원사로 가지고 있는 한국양회공업협회(이하 양회협회).
유 아무개 B레미콘사 사장은 지난해 말 양회협회의 한 고위간부로부터 "'G사는 시멘트업계의 커다란 해악이다. 지난번 J레미콘사도 슬래그 분말공장을 지으려다가 완전히 항복한 이후에도 시멘트를 공급받는데 6개월 이상 어려움을 겪었다. 유 사장도 그와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G사의 생산량을 반으로 줄여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토로했다.
이후 지난 1, 2월부터 시멘트 업체들은 B레미콘사에 대해 '재고 부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시멘트 공급을 줄여나갔다. 하지만 시멘트 업체들은 B레미콘사을 제외한 나머지 레미콘 회사들에게는 평소대로 공급하고 있었다. B레미콘사에 대한 공급량 축소는 3월 이후부터 더욱 확대됐다.
B 레미콘사의 월별 시멘트 공급내역에 따르면, 3월 한 달 동안 대표적인 7개 시멘트 업체들로부터 받은 물량은 모두 12만5905톤이며, 4월에는 9만597톤으로 줄었다. 5월에는 14일까지 2만5427톤만 공급받았을 뿐이다.
B 레미콘사 관계자는 "이같은 물량은 회사가 필요로 하는 수준의 20%에 불과한 수치"라며 "3, 4월 들어 대형 시멘트 업체들이 하루에 적게는 200톤부터 많게는 2000톤까지 물량을 줄였다"고 말했다.
결국 G사는 지난달 7일 시멘트업계의 요구에 따라 슬래그 분말의 외부판매 중지를 결정하게 되고 내부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하지만 B레미콘사에 대한 시멘트 업계의 시멘트 공급제한은 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물량을 더욱 줄여나갔다.
지난 5월 6일에는 대형 시멘트 회사 7개사들이 전국의 레미콘 회사에 슬래그 분말 사용에 대한 '협박성'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주요 내용은 레미콘 회사가 슬래그 분말을 사용해 레미콘을 제조하다가 하자가 발생할 경우 전적으로 해당 레미콘사에 책임이 있다는 내용이다.
B 레미콘 고위 관계자는 "이들 7개사들은 6일자로 동시에 글자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공문을 발송했다"면서 "사실상 슬래그 분말을 넣어 쓰지 말라는 협박성 공문이나 다름없다"고 전했다.
결국 B레미콘쪽은 지난 5월 13일 양회협회를 방문, △인천 북항 부두 개발 계획 포기 △ G사의 슬래그 분말 제품 공급을 자가 소모 용도로 국한하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접수했다. 하지만 양회협회쪽의 반응은 냉담했다. 협회는 G사의 슬래그 분말 '공급 감소'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G사의 사실상 '폐업'을 종용했다.
B 레미콘 관계자는 "지난 20일 협회 회원사의 고위간부가 전화를 걸어와 '시멘트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G사를 완전히 문닫고, 업계에 G사 매입을 부탁하면 될 것이다'며 노골적으로 폐업을 요구해왔다"고 주장했다.
도산위기로 몰리는 회사, 레미콘·덤프기사 집단행동 움직임
시멘트 업체들로부터 시멘트 공급을 대폭 삭감당한 B사는 지난 4월말 현재 367억원의 매출 손실을 기록했으며, 영업 손실액만 65억원에 달했다. 5월 들어 손실 규모는 더욱 늘어나 향후 매달 300억원 규모의 매출 손실이 날 것으로 회사쪽은 예상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시멘트 업체들의 불법적인 담합행위로 회사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다"면서 "이 상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조만간 도산위기에 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는 회사뿐 아니다. 회사와 관련돼 있는 레미콘과 트럭 운전 노동자들의 생계도 위협을 받게 된다.
실제로 이 회사에 속해 있는 레미콘 차량만 1000여대. 최근 시멘트 공급 물량이 감소하면서 레미콘 생산량도 줄어들어 이를 운반하는 기사들의 수입도 급감하고 있다. 골재 등을 나르는 덤프트럭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많은 레미콘 운전기사들이 지난해 5000만원이 넘는 차량을 할부로 새로 구입하면서 심한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 관계자는 "매달 50만원 이상의 차량 할부금에다 운행 횟수가 줄어들면서 수입감소 등으로 생계가 극히 어려운 상황"이라며 "자칫 지난 화물연대 파업에 이어 레미콘과 골재 운반기사들의 집단행동까지도 우려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주택공급 원가 상승시켜 국민들 피해
국내 시멘트업계의 시장규모는 약 3조5000억원대로 추정되고 있다. 양회협회에 등록된 11개사 가운데 이번 담합 카르텔에 참여하고 있는 회사는 쌍용, 동양, 라파즈한라, 성신, 한일, 아세아, 현대 등 7개사.
시멘트업체들은 가격담합으로 인한 불공정행위로 98년에 68억원, 2001년에 46억원의 과징금을 물었으나 담합행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2002년 시멘트 카르텔 7개사의 영업이익은 8700억원으로 영업이익률이 21.4%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멘트 가격은 97년에 1톤당 5만2000여원이었는데 현재는 7만여원에 달해 약 34%나 인상됐다"면서 "이는 같은 기간의 소비자 물가지수 인상률 18.5%의 두 배에 달하는 것으로 결국은 시멘트업계의 담합에 아파트 등 신축건물 소비자인 국민들까지 피해를 보는 셈"이라고 말했다.
시멘트업체들의 담합은 이밖에도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우선 ▲예전에는 쓰레기 취급을 받았던 포스코의 슬래그를 친환경적으로 재활용하는 것을 막고 있으며 ▲레미콘업체와 그에 종사하는 레미콘업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으며 ▲시멘트가격 담합으로 주택공급 원가를 상승시켜 아파트 등 신축건물 소비자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
공정거래위 "위법행위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 공동행위과의 한 관계자는 "업체들이 서로 가격을 조정하거나, 생산량 또는 공급물량을 조절하는 행위가 입증이 될 경우는 이는 법적으로 공동행위(담합)이며, 위법행위로 볼 수 있다"면서 "따라서 피해업체가 신고를 해오거나 사건화가 될 경우 공정위 차원에서 조사를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국양회공업협회의 이 아무개 상근 부회장은 29일 <오마이뉴스>가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취재를 요청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를 들어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