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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하응백.
문학평론가 하응백. ⓒ 홍성식
낚시를 한다는 것은 기다림과 여유를 배우는 과정이다. 유년시절 경남 삼랑진의 외가를 찾을 때면 네댓 살 터울의 육촌 형들과 저수지로 가물치를 낚으러 다니곤 했다. 단 한 번도 시골에서 살아보지 못한 도시아이였던 기자는 개구리를 미끼 삼아 가물치를 낚는 민물낚시가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한 나절을 물위에 뜬 형광색 찌만 바라봐야하는 곤혹스러움. 게다가 후끈거리며 머리통을 달구는 여름 햇살이라니.

그럼에도 겨우 중학생인 육촌 형들은 의젓하게 앉아 고기를 기다릴 줄 알았다.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고 조용히 낚싯대를 드리운 채 수면을 바라보는 그들의 성스럽기까지 한 뒷모습에서 기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어른'을 보곤 했다.

한 시간도 못돼 맨땅에 닿아있는 엉덩이가 저려온다고 칭얼대는 기자에 비한다면 하루종일 묵묵히 미끼를 꿰고 가물치를 기다리는 그들은 선천적으로 기다림과 여유를 타고난 듯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기다림과 여유는 선천적이라기보단 낚시를 통해 단련된 것이었지 싶다.

그리고 25년이 넘는 시간. 기자는 아직도 조급증환자에 가깝다. 촐랑대는 천성을 버리지도 낚시를 배우지도 못한 것이다.

2000년 초가을이었던가? 소설가 황순원이 세상을 떠났다. 인사동 인근 머릿고기집에서 시인 신동호와 낮술을 마시다가 급전을 받고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영안실을 향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기자는 취재를 위해 간 그곳에서 '낮술에 취하면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난동(?)을 부렸다. 흰소리와 오버액션.

황순원이 재직했던 경희대 국문과의 제자(그들 대부분은 문인이다) 수백 명이 찾은 그 자리. 바로 거기에 평론가 하응백(42)이 있었다.

그 역시 황순원에게서 문학을 배운 하응백은 조의금 접수와 안내를 맡아 밤새 한숨 못 자고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경건해야 마땅할 영안실에서 얼굴조차 낯선 어린놈이 온갖 주사(酒邪)를 보였으니 창졸간에 스승을 잃은 그의 심사가 어떠했을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면서도 하응백은 쓰다 달다 말 한마디가 없었다. 비단 기자만이 아이라 어느 상가(喪家)에서도 있기 마련인 취객들을 달래고 진정시키며 '씨익'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뿐이랴. 하응백의 취객달래기와 궂은 일 처리는 그날 하루가 아닌 스승의 장례가 온전히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하응백이 자타가 공인하는 낚시광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이듬해 판화가 남궁산의 전시회에서였다.

자신의 책임을 표시하기 위해 붙이는 장서표(藏書票)를 모아 전시한 행사장에서 본 하응백의 장서표. 거기엔 품종을 알 수 없는 민물고기가 그려져 있었다. 남궁산에게 물었다.

"왜 하필 물고기죠?"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하응백 하면 낚시잖아요."

그 순간 떠오른 유년시절 육촌 형들과의 추억. 하응백 역시 그들처럼 기다림과 여유를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술 취한 사람이 술이 깰 때까지 기다려주는 여유와 취객들의 행패를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관조할 줄 아는 넉넉함.

문학평론과 대학강의를 주업으로 하던 하응백은 1년 전쯤 출판사 '휴먼앤북스'의 사장으로 전업했다. 악화일로를 걷는 한국 출판시장에서 책을 낸다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그럼에도 기자는 하응백이 이에 대해 엄살 떠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문학과 출판의 미래를 낙관하는 보기 드문 사람이다.

하긴 그가 스승의 빈소에서 보여줬던 기다림과 여유라면 지금보다 더한 상황이 도래한대도 꿈쩍 않고 의연하리라. 기자 역시 더 늦기 전에 기다림과 여유를 배우려면 언제 한번 시간을 청해 그와 낚시라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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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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