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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문화분야 취재 역시 사람 만나는 게 일의 절반이다. 아직은 순수와 낭만을 가슴에 품고 사는 예술가들이고 보니 취재가 술자리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 이 기사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대작(對酌)한 기록인 동시에 한국 문화계에 대한 기자의 인상기다... <편집자 주>

▲ 만화가 주완수.
ⓒ 홍성식
<보통 고릴라>라는 희한한(?) 만화책을 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8년이다. 만화란 '낯 간지럽고 유치한 것'이란 철없는 생각을 가졌던 기자에게 사촌형의 권유로 우연히 읽게된 <보통 고릴라>는 충격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다.

1988년이 어떤 해인가. 공포와 폭력을 무기로 전횡을 휘두른 전두환 군사독재의 그늘이 채 사라지기 전이었고, "수 조원의 돈을 선거자금으로 뿌렸다"는 흉흉한 소문 속에서 그 역시 군인이며, 전두환 정권과 뿌리를 함께 하는 노태우가 대통령에 오른 해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어디로 끌려가 무슨 수모를 당할지 모르는 시대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겁도 없지. <보통 고릴라>의 작가인 주완수(당시 29세)는 그 무시무시한 전·현직 대통령을 우스꽝스러운 고릴라에 빗대 당대의 정치와 사회, 경제와 문화의 피폐한 현실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고등학생의 눈으로 보기에도 번득번득 빛나는 역사의식과 만화 속에 스며든 해박한 지식. <보통 고릴라>는 만화에 대한 기자의 편견을 무너뜨렸다.

"그걸 그리면 감옥에 가거나 유명해질 줄 알았는데 감옥도 못 가고, 유명해지지도 못했다"며 껄껄 웃는 주완수를 직접 만난 건 <보통 고릴라>를 접한 지 11년이 지나서였다. 1999년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당시 일하던 신문사의 연재기사였던 '우리시대의 만화가'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났고, "책이 나온 때부터 지금까지 팬이다"라는 고백의 말을 전했다.

커다란 덩치에 우락부락한 인상과는 딴판으로 잔정 많아 보이는 주완수는 그 고백에 부끄러워하며 술을 권했다. 창 밖으로 내다뵈는 북한산을 바라보며 대낮부터 권커니 자커니 마신 소주. 그의 일본인 아내 시무라 유리가 만든 오렌지소스의 감칠맛과 낮에 마신 독주(毒酒)의 혼곤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다 놓은 소주를 다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맥주까지 반 박스 가량 비우고 나니 이것이 인터뷰인지, 작가와 철없는 팬의 날라리 술판인지 헷갈려왔다.

그 취기의 끝에서 주완수가 이런 말을 했다. "만화는 지상 최고, 최후의 예술"이라고, "만화가는 시대의 절망과 아픔을 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婢)"라고.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기자는 자기 일에 대해 그토록 명료하고 명확한 확신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다. 취중임에도 가슴이 울컥 뜨거워졌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로부터 다시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이제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가 된 주완수를 인사동의 술집과 명동입구의 중앙시네마에서 두어 차례 더 만났다. 술 좋아하는 작가와 팬이니 만날 때마다 필름이 끊기도록 거하게 마셨음은 물론이고, 또 매번 들어도 지겹지 않은 '만화가 곡비론'을 강의 받았다.

종로구 평창동으로 집을 옮긴 주완수는 요새 화가, 시인들과 자주 어울린다고 한다. 그들의 만남이 희망 없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곡비들의 모임이 되고, 거기에 더해 '만화가 곡비론'이 '예술가 곡비론'으로 외연을 넓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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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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