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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문화분야 취재 역시 사람 만나는 게 일의 절반이다. 아직은 순수와 낭만을 가슴에 품고 사는 예술가들이고 보니 취재가 술자리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 이 기사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대작(對酌)한 기록인 동시에 한국 문화계에 대한 기자의 인상기다......<편집자 주>


▲ 그 눈빛이 녹두장군을 닮은 소설가 송기숙.
ⓒ 노순택
지금도 게재돼있는지 모르겠지만 기자가 학생이던 시절 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실패한 혁명가의 사진 한 장이 실려있었다.

갑오농민전쟁의 탁월한 지도자였으며 봉건 조선의 심장을 향해 급진적 정치개혁을 요구한 녹두장군 전봉준.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가마에 실린 채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혁명가의 모습을 찍은 그 사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눈빛이다.

비록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의 큰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불의한 역사 앞에 당당히 저항했던 남접(南接)의 최고 지도자로서 품위를 잃지않는 의연한 눈빛. 당당하면서도 범인을 주눅들게 하는 매서운 그 눈망울은 초라한 입성과 오라에 묶인 팔다리와는 별개로 너무도 오연(傲然)했다.

전쟁에 패한 장수의 초라함과 곧 닥쳐올 죽음의 공포마저 압도하는 전봉준의 눈빛. 소설 <암태도>와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69)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 그는 부정과 부패를 일삼던 독재정권과 인간을 인간으로 살 수 없게 하는 '부자들의 세상'을 향해 전봉준처럼 눈을 치떴던 사람이다.

서러움과 제어하지 못한 분노에 이글거리는 두 사람의 눈동자. 전봉준의 눈빛이 1800년대 말 억눌린 민중을 일으켜 세워 해방세상을 향해 달리게 한 신호탄이었다면, 백두산호랑이를 닮은 송기숙의 눈빛은 1980년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싸움을 독려하는 횃불같은 것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그 눈빛의 힘으로 송기숙은 유신치하 교육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며, 1980년 5월 '죽음의 땅' 광주에서 시민들과 함께 싸웠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의 산파역할을 했으며, 자신이 교수로 재직했던 전남대에 5월문제 연구소를 설립했다.

죽는 그날까지 역사의 한복판에 서있기를 바라며 평생을 거리에서 살아온 '살아있는 현대사 교과서' 송기숙. 그도 이젠 고희(古稀)를 눈앞에 둔 노인이 됐다.

압제자를 향한 분노의 눈빛이 아닌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온화한 할아버지의 눈망울로 살아도 좋을 나이.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가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모양이다.

지난해 여름이다. 송기숙이 상임고문으로 있는 문인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100여명이 전북 무주로 수련회를 갔다. 통돼지구이를 안주 삼아 옥수수 막걸리가 새벽까지 돌았고, 간만의 나들이가 주는 해방감과 서울과는 판이한 시원스런 풍광에 너나 없이 즐거워했다. 그런데, 송기숙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날, 역사의식과 약자를 향한 목소리가 거세된 오늘의 한국문학을 개탄하고 그 미래를 걱정하며,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을 꾸짖던 송기숙의 목소리는 웃는 얼굴로 술잔을 든 여러 후배들을 부끄럽게 했다.

"도대체가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라고 일갈하는 송기숙의 화난 얼굴을 보며 기자는 다시금 역사교과서에서 본 녹두장군의 눈빛을 떠올렸다. 전봉준을 닮은 그의 순결한 분노가 아름다워 보였다.

동시에 기자의 가슴을 친 슬픔 하나. 그 슬픔의 이유는 왜 시대는 우리에게 송기숙의 자애로운 눈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얼마나 더 살아야 일흔 노인 송기숙의 분노와 슬픔은 끝이 날까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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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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