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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문화분야 취재 역시 사람 만나는 게 일의 절반이다. 아직은 순수와 낭만을 가슴에 품고 사는 예술가들이고 보니 취재가 술자리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 이 기사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대작(對酌)한 기록인 동시에 한국 문화계에 대한 기자의 인상기다.... 편집자 주

▲ 시인 이산하.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지난해 겨울. 대통령 선거가 있기 하루 전이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문인들의 술자리는 밤이 깊도록 계속됐다. 소설가 2명과 시인 3명이 이회창과 노무현 그리고, 정몽준과 권영길을 안주 삼아 홍익대 인근에서 맥주를 마셨다. 불과 몇 시간 후면 선거가 시작될 무렵. 한 시인의 핸드폰이 다급하게 울었다.

그 통화가 채 끝나기도 전 연이어 울어대는 다른 시인의 핸드폰. 그들이 전한 '정몽준, 노무현 지지철회'라는 소식은 파장 분위기이던 술자리를 다시 뜨겁게 달궜다.

"지금도 박빙우세라는데, 이러다 지는 거 아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찾아가서 설득하겠지. 어쨌건 승리를 위해선 안고 가야하니까."
"아냐. 갑작스런 돌변이 아닌 것 같애. 힘들어지겠는데."

별별 추측과 가지가지 예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별다른 말없이 자리를 지키며 비어있는 술잔만을 묵묵히 바라보던 시인 이산하(42). 그가 시끌벅적한 좌중을 바라보며 딱 한마디를 던졌다.

"잘 됐네 뭐. 어차피 털고 가야 될 사람이야. 해외유학을 다녀온 재벌과 고졸 출신 인권변호사는 애초부터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어. 정몽준 없이도 잘 될 거야."

무슨 예언처럼 던진 이산하의 말은 적중했다. 이튿날 밤 노무현은 이회창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고 동시에 정몽준 몫에 대한 부채감 없이 국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노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후보시절이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도래했지만 그건 이 글의 핵심이 아니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겠고, 어쨌건 기자는 그날 이산하의 다소 낭만적이긴 했지만 정확하게 정세를 판단하는 안목에 놀랐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일이 있기 전 수십 차례의 술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이산하의 해박한 정치관련 지식과 사통팔달 하는 정세판단 능력은 그를 시인이 아니라 무슨 정치평론가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산하는 군사독재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머리까지 통제하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지 현실에선 불능의 명제였다. 가난했지만 영민했던 소년문사 이산하는 그의 전부였던 '시'를 주저 없이 버리고 '비합법 지하신문'을 선택한다.

시련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회유와 협박 등 정신적인 탄압에서부터 수배와 감금 등 물리적 압박까지 국가권력이 행사한 다종다양한 폭력은 스물 한 살 문학청년을 투사로 변모시켰다.

길고도 길었던 4년의 수배생활. 언제 어디서 공안기관의 요원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시간들. 그 와중에도 이산하는 지하에서 자신이 속한 정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팸플릿을 만들었고,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역저 <한라산>도 당시에 씌어진 것이다.

이산하의 탁월한 정세판단 능력은 바로 이런 시절이 선사한 달갑지 않은 선물이 아닐까? 불의한 시대는 그에게 현실정치의 흐름을 읽고 향후 사회변화를 예측해야하는 고단한 작업을 끊임없이 강요한 것이 아닐까? 혹 그날 밤 이산하는 캄캄절벽의 수배생활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희망을 다시 떠올린 것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며 기자는 슬퍼진다. 시인을 시인으로 살지 못하게 한 1980년대. 이제 좀 좋은 시절이 와서 정치평론가 이산하가 아닌 시인 이산하를 보고싶은데. 과연 그런 날이 우리에게 와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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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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