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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문화분야 취재 역시 사람 만나는 게 일의 절반이다. 아직은 순수와 낭만을 가슴에 품고 사는 예술가들이고 보니 취재가 술자리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 이 기사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대작(對酌)한 기록인 동시에 한국 문화계에 대한 기자의 인상기다......<편집자 주>

▲ 박철 시인
ⓒ 홍성식
그가 노래하는 모습은 슬픈 정물화를 닮아있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몸무게 50Kg을 넘긴 적이 없다는 파리한 얼굴의 병약한 사내. 하지만 선천적이라 할 시심(詩心)을 무기로 또래의 수많은 여학생들을 극장 앞이나 논둑길에서 노란 우산 쓰고 하염없이 기다리게 만든 사람.

꿈꾸는 소년의 눈동자를 가진 박철(43) 시인이 인사동 어느 허름한 목로에서 노래를 불렀다. 2000년 겨울이었고, 바람이 몹시 불었으며, 나를 포함한 모두는 대낮부터 시작된 술추렴에 고주망태로 취해있었다. 그 노래는 이장희의 '불꺼진 창'이었던가 아니면, 김정호의 '하얀 나비'였던가.

소설가 현기영이 변방 제주도를 '한국문학의 중심'으로 옮겨온 사람이라면, 시인 박철은 서울 속의 깡촌인 김포를 시끌벅적 번화한 광화문 한복판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당겨놓은 사람이다.

1987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게재된 그의 등단작 '김포'와 1990년 발간된 첫 시집 <김포행 막차>는 '변두리 김포'의 존재를 당당하게 독자들에게 알렸고, 사람들은 어떤 사연이나 역사도 간직하지 못한 그 황량한 곳(?)에서도 시인이 태어나 자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어릴 적부터의 지병 탓에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시인의 얼굴은 오래 앓아온 아이의 그것처럼 핼쑥했다. 취중에 어쩌다 잡아본 그의 손목은 왜그리 부러질 듯 여위었던지. 마냥 약하게만 보이는 박철이 그 가슴속에 천하장사보다 더 배짱 좋은 '또 다른 박철'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다.

2002년 9월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50년 분단의 장벽을 넘어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 여성응원단이 남한에 왔다.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일부러 예쁜 여자들만 보내 남한 남성들의 혼을 빼놓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들끓었다.

이 와중에 박철은 자그마치 4일을 만경봉호에서 그들과 함께 지냈다. 한 일간신문이 그에게 이 보기 드문 역사를 기록해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당시는 햇볕정책 아래 남북화해 무드가 조성됐던 시기. 하지만 남과 북의 분단상황이란 언제든지 악화될 수도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다.

게다가 엄존하는 국가보안법. 배 안에서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행동 하나 하나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부자연스러울 것인가. 하지만, 박철은 신문사의 북한 응원단 동행취재 요구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응했다.

취하면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구슬픈 노래를 애수 어린 음성으로 읊조리는 사슴을 닮은 시인은 늦은 밤 겹겹이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부산 다대포항의 만경봉호로 걸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단국의 시인이 안고 살아야할 슬픈 운명? 아니면 같은 핏줄의 사람들이 외떨어져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국의 아픈 현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던가. 마찬가지다. 인사동 술집에서 여윈 얼굴로 슬픈 노래를 부르는 소시민 박철은 약해 보였지만, 시인 박철은 강했다. 그는 지금 만경봉호에서 머물렀던 4일을 시로 쓰고 있다. 그 노래는 어떤 곡조일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슬픈 개인의 넋두리 건, 공동체가 부르는 희망의 합창이건, 누구도 '여윈 육체 속에 강건한 정신을 담고있는' 박철의 노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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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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