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젊은 철학자 이진경이 쓴 <근대적 시ㆍ공간의 탄생> 서평을 소로우의 <월든>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소로우가 지금으로부터 150년도 전에 벌써 우리의 삶을 장악하고 지배한 근대적 시간의 획일성을 통찰하고 그로부터 탈주를 추구하고 실천한 보기 드문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인공의 도시를 벗어나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보낸 그의 2년 동안의 숲 속 생활은 그 탈주의 정점이었다.
이진경이 <근대적 시ㆍ공간의 탄생>에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이러한 '탈주'에 있다. 서문에서 그는 "근대적 삶에 대한 사유와 그로부터 탈주선을 그으려는 시도에 (이 책이) 조금이나마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힘으로써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탈주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가 현재와 같은 삶의 방식을 채택하게 된 것은 근대(modern)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근대적 삶의 방식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을 계속 지배하고 있다.
물론 수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도 탈근대(post-modern) 개념이 도입되면서 지금 이 시대를 근대를 넘어선 자리에 놓으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어 왔다. 하지만 탈근대는 근대라는 거대한 벽화의 일부에 불과하며 그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체 내에 근대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은 여전히 '근대적' 시ㆍ공간의 영향권 아래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진경 역시 <근대적 시ㆍ공간의 탄생>에서 우리의 현재적 삶의 좌표를 근대적 시ㆍ공간에 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근대인의 내적인 존재형식인 시간과 근대적 삶을 규정하는 외적 환경인 공간을 꼼꼼히 분석함으로써 우리에게 탈주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는 우선 자연적 리듬으로서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던 근대 이전의 시간이 근대를 통과하면서 어떻게 우리의 삶을 강제하고 지배하는 내적인 존재형식으로 변모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적 시간'의 역사로부터 출발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 이전에는 계절마다, 나라마다, 문화권마다, 심지어는 각 개인들마저도 조금씩 다른 구체적인 삶의 리듬이던 시간은 근대를 통과하면서 전 지구적으로 통일되고 각 개인들의 삶까지도 표준화한 '제국주의적 시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전과 달리 사람들마다 갖고 있는 삶의 고유성과 이질성을 허용하지 않는 이러한 근대적 시간은, '시간은 돈이다'라는 격언이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듯이 '자본주의적 시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은 그 효율성에도 그로부터 탈주해야 할 부정적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근대적 시간에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치 내지 화폐(돈)라는 동일한 형식으로 변형시키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삶 전체를 획일화하려는 일종의 권력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늘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처럼 이미 우리 삶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어 지배하는 생체권력이 된 이 근대적 시간으로부터의 탈주는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이진경은 뭔가를 기다리며 하늘 한가운데 멈추어 서 있는 매의 예를 들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 매는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절대적인 속도로 하늘에 떠 있는 것이며, 이것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것보다 훨씬 힘든 '내공'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매는 하늘 상공에 흐르고 있는 바람의 속도라는 관성을 거슬러야 하고 동시에 멈추면 땅으로 떨어지는 중력의 힘에서도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가 온 몸으로 유지하고 있는 절대적인 속도처럼, 우리도 강요된 속도나 시간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속도와 리듬을 갖는 것, 그리하여 자율적인 삶의 리듬, 일의 리듬, 사유의 리듬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근대적 시간에서 탈주하는 순간이라고 이진경은 말한다.
한편, 근대적 시간이 동질적이고 균질적인 척도로서 특수한 영역이나, 장(場), 공간을 넘어서는 일반성을 확보하게 된 것과는 달리 근대적 공간은 공간별 특수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진경은 이를 공간의 '구획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지금처럼 학교와 공장, 병원이나 감옥, 사무실과 집이라는 각각 기능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독립된 공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 나타난 공간의 구획화를 통해 이루어진 성과라는 것이다.
서유럽에서 18세기 이전까지는 일터와 집이 분리되지 않았고, 16세기 이전의 학교도(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학교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한 쪽 방은 학생들에게 임대되어 있었지만 다른 방은 매춘부들에게 임대되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이렇게 미분화된 공간들이 근대에 오면서 다른 공간과 구별되는 독립된 부분공간들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부분공간들은 그 안에서의 특정한 지형적 배치와 그에 상응하는 양식화된 행위의 집합을 통해서 외부로는 이질성을 확보하고 내부로는 동질성을 강화한다. 이진경은 근대에 와서 새롭게 출현한 공간인 학교와 공장,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크게 변화한 공간인 집을 예로 들어 이를 아주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공간들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부분공간들 내에서 능동적인 위치에 있든 수동적인 위치에 있든 간에, 이러한 근대적 공간들이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는 공장이라는 공적 공간에서 뿐 아니라 집이라는 사적이고 능동적인 공간에서조차도 우리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그 모토로 삼는 자본주의 욕망에 묶인 우리의 신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학교와 병원, 감옥 등 수동적인 위치의 신체(학생, 환자, 죄수)와 능동적인 위치의 신체(교사, 의사, 간수)가 함께 존재하는 공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학교의 경우, 훈육하는 신체와 훈육되는 신체는 모두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한 노동력의 생산이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대칭을 이루게 된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경이 "우리는 건물의 모양을 만들고 건물은 우리의 모양을 만든다"고 말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토대를 지닌 근대적 공간은 우리의 삶을 자본주의 욕망에 길들게 만든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탈주하는 것은 역으로 우리 삶의 공간을 변혁시킴으로써 가능하지 않을까?
사회주의 혁명이 새로운 종류의 공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혁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혁명이라는 말에 충분하게 값하지 못했다는 르페브르의 비판에 이진경이 동의를 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와 함께 그는 근대의 이념적 깃발이기도 한 '진보' 개념에 대해서도 의혹의 눈길을 던진다. 즉 직선적이고 누적적인 시간 개념, 목적론적 발전 개념, 인간중심주의적 가치 개념, 그리고 부분을 통합하고 동질화하면서 확장되는 전체론적 관점이라는 진보의 기본 전제들에 대해서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진보 개념을 세우는데 그것은 바로 '탈주선 위의 진보'다. 이에 따르면 진보는 기존의 시ㆍ공간적 용법이나 배치에서 벗어나 다른 용법, 다른 배치를 이루게 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이 때 진보적인 것이라는 판단의 기준은 '능력의 확장'이라는 기준인데 그 능력이란 바로 이질적인 것을 담아내고 수용하며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진보를 정의해주는 '능력'이란 이제 새로운 창조와 창안, 변이들이 생성될 수 있는 탈주의 공간, 그 여백을 통해 정의해야 한다고 이진경은 말한다. <근대적 시ㆍ공간의 탄생>의 맨 마지막에서 제안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시간의 묘사는 바로 그러한 탈주가 향하고 있는 아름다운 지점일 것이다.
"하나의 단일하고 선형적인 시간성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리듬을 갖는 복수의 시간성, 각각의 부분을 하나의 전체로 동질화하는 시간성이 아니라 국지적인 이질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그것을 넘나드는 변이의 시간성, 역사의 시작과 끝을, 진화라는 과정 전체를 인간이 장악한 시간성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변이의 선이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생성의 시간성"
소로우는 "나는 내 인생에 넓은 여백을 갖기를 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말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 자신의 탈주를 완성하였다. <월든>은 그 여백에 기록한 탈주의 기록인 셈이다.
이진경의 <근대적 시ㆍ공간의 탄생>을 읽어보면, 왜 19세기에 이루어진 소로우의 탈주가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사상가의 행위보다도 더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받는지를 깨닫게 된다.
여기에 수학·인류학·사회학·심리학에 이르는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회화·건축·음악·영화·사진 등 예술 전반을 망라하고 있는 흥미로운 도판들은 다소 어렵고 무겁게 여겨질 수도 있는 철학서적인 <근대적 시ㆍ공간의 탄생>을 끝까지 흥미롭게 읽게 하는 힘이 되고 있음을 덧붙인다.
| | 이진경은 누구인가 | | | | 본명이 박태호인 이진경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재학 중인 1987년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라 책을 펴내 주목을 받았다. 또한 직업적 혁명가 조직을 결성하여 <노동계급>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덕분에 2년 간의 징역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붕괴 당시, 그는 사회주의는 왜 망했으며 자본주의는 왜 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 이 화두의 답을 찾고자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의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의 붕괴의 근저에 ‘근대성’이라는 속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근대성’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면서, 근대성의 역사적 형성 지점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가 특별히 시간과 공간의 역사, 건축사, 미술사, 수학사 등을 연구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책을 쓴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철학과 굴뚝청소부>,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관한 7편의 영화>, <철학의 탈주>,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근대적 시ㆍ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맑스주의와 근대성> 등이 그 결과물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근대성’이란 테마는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생산이라는 문제로 바뀌었고 이를 위해 ‘꼬뮨주의’라는 새로운 주제를 화두로 삼아 사유하고 있다. 그의 ‘꼬뮨주의’는 ‘공산주의’라는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꼬뮨주의’에서는 ‘노동’이나 ‘생산’, ‘유몰론’ 같은 맑스주의의 기초적인 개념들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학교에서 하는 강의로는 이런 문제의식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연구 공간 ‘너머’> 및 <수유 연구실>에서 강의와 세미나에 몰두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천의 고원>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강의한 지난 4년 동안의 강의록을 묶어 2권으로 펴낸 역작 <노마디즘>은 그 성과이다. / 정철용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