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의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라는 책을 아는가? '이진경'이라는 이름에 친근하지 않은 사람은, 다소 길고 이색적인 책 제목에 '영화'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이 책이 영화에 관한 책이라고 지레 짐작할 지도 모르겠다.
이와는 반대로 이진경이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아웃사이더 그룹인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핵심 논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탈주의 철학'이라는 단어를 보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그 난해한 철학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 어느 쪽에 속하든 간에 일단 이 책을 집어 들고 본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하면, 당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많은 영화 관련 서적들처럼 가볍게 흥미 위주로 읽을 책이 결코 아니며 그렇다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난해한 철학책도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이 책의 참된 성격은 '영화'나 '철학'이 아니라, 저자가 새롭게 만들어 낸 '필로시네마(philocinema)'라는 신조어에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이 철학(philosophia)이 되었듯이, 이 책은 영화(cinema)에 대한 사랑(philos)을 누를 길 없었던 한 철학자가 영화관에 가서 쓴 책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영화의 속도감과 철학의 깊이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보기 드문 미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짧은 컷에 의해 전개되는 영화의 속도에서 자칫 우리가 쉽게 간과해 버릴 수도 있는 철학을 포착해서, 그것을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고 전체적인 영화 구조 속에서 그물망으로 엮어내는 솜씨는 영화팬 이진경이 철학자 이진경에게 빌려온 것일 터이다.
한편으로 지나치게 에둘러가는 듯한 지루하고 느린 철학자의 산책에 영화적 속도감을 부여하고, 그 속도감 속에서 마치 카메라의 몽타주 기법처럼 사유의 흐름을 정교하고 중층적으로 구축하여 연결하는 명쾌하고도 섬세한 논리의 전개는 철학자 이진경이 영화팬 이진경에게 빚지고 있는 능력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진경 스스로는 "이 책을 철학이나 영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탈주에 대한 것으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책머리에 밝히고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카프카>를 다루는 자리라면 한 번쯤 언급하고 지나갔을 법한 이야기, 즉 그가 26세 때 만든 장편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깐느 영화제의 정상에 올랐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를 다루면서, 인상적인 정박아의 연기로 조니 뎁 못지 않은 스타덤에 오르게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은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찰스 채플린의 흑백 무성영화 <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7편의 영화를 보는 그의 주요 관심사는, 영화 감독이나 배우, 편집이나 촬영 등 우리가 '영화'라는 말에서 흔히 떠올리는 흥미 위주의 이야기 거리나 기술적인 요소들에 있지 않다.
그는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들과 그 대사들을 포함하는 세부 내러티브들을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망과 관련지어 분석함으로써 영화의 의미와 구조를 새롭게 해석해내는 텍스트 분석에 주력할 뿐이다.
이 때 그가 분석의 기본 도구로 사용한 것이 바로 <안티-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으로 잘 알려진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 즉 그가 '탈주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7편의 만만치 않은 영화들에서 읽어낸 '탈주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그의 정의에 따르면 '탈주'는 현존하는 세계를 질서 짓고 그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선을 허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경계선은 탈주하려는 자에게는 하나의 벽일 터이다. 따라서 그의 책은 핑크 플로이드의 2장짜리 앨범을 영화로 만든 알런 파커 감독의 <벽>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벽을 깨뜨리면서 나아가는 탈주야말로 우리의 사고와 삶이 나아갈 수 있는 경계를 확장하는 새롭고도 창조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탈주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블레이드 러너>와 <토탈 리콜>을 분석한 글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암울한 미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가 읽어내는 것은, 인간 조건처럼 여겨지는 오이디푸스 구조가 사실은 인간을 길들이고 지배하기 위해 근대의 자본주의가 창조해 낸 통제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그 오이디푸스 구조의 본질을 바로 보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몸짓, 즉 탈주의 몸짓이야말로 인간을 정말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탈주하는 자만이 인간적이다"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한편 <토탈 리콜>에서는 실재계와 모사계가 서로 섞여 있는 괴델적인 이 근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탈주하려는 자의 주체의 동일성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그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과 복제 인간을 구별하는 경계선이 결코 '기억'에 있지 않았듯이, 주체의 동일성 역시 결코 '기억'에 의해서 확보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속의 반란군 우두머리가 했던 대사를 빌려 "인간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에 의해서 정의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동, 즉 실천을 통한 탈주의 결행은 쉽지만은 않다. 우리의 근대적 삶은 우리 신체에까지 새겨진 생체 권력에 의해서 철저히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던 타임즈>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멈춘 점심 시간에도 멈추지 않고 너트를 조이는 동작을 계속하고, 심지어는 여자 옷에 달린 단추만 보아도 조이기 위해 달려드는 채플린의 희극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생체 권력의 한 극한을 보게 된다.
이와 함께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비대한 몸집의 어머니로 구체화되고 있는 근대 가족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도 탈주하려는 우리의 발목을 죄는 족쇄가 된다. '스위트 홈'이라는 잘 알려지고 널리 퍼져 있는 근대 가족의 이데올로기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유목민을 가족이라는 정착적 공간 안에 가둔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근대적 삶의 공간 속에 음험하게 도사린 권력의 징후를 느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고 억압받지 않는 삶, 즉 유목민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그 욕망은 탈주의 동력이 된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 욕망이 '결핍'이 아니라 '생산'으로 정의되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유로운 욕망을 동력으로 하는 탈주의 실천이 단지 <카프카>의 주인공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쉽게 권력에 의해서 추적당하고 마침내는 다시 그 권력의 지배에 포섭되고 말 위험이 있다. 비록 그 탈주가 정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가면서, 다른 양상의 탈주를 수행하고 다양한 동조자들을 만들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탈주하도록 자극하는 '유목적 탈주'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진경은 또 하나의 탈주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혁명적 탈주'다. 폭탄을 들고 성 안으로 잠입하는 <카프카>의 혁명가 집단과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 연인>의 마지막에 보여준 욕망과 노동자 계급의 동맹처럼 이 '혁명적 탈주'는 훨씬 더 급진적이다.
여기서는 성(城)의 관료인 '문나 박사'와 식당의 주인인 '앨버트'로 대표되는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이 단순히 한 개인의 탈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동맹 관계로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제 카프카는 혁명가 집단의 저항 방식대로 성 안으로 폭탄을 들고 들어가 문나 박사의 작업실에서 터뜨리며, 앨버트의 성적 노리개였던 조지나는 요리사 리차드, 즉 노동자 계급의 도움을 받아 앨버트의 무한 권력을 극적으로 전복시킨다.
욕망과 혁명이 조우하는 이 지점이야말로 탈주하려는 자가 통과해야 할 지점이라고 이진경은 말한다. 이 지점을 넘어설 때 비로소 우리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던 외부를, 그러나 이미 존재하고 있던 그 외부를 새롭게 창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는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탈주의 철학'을 이끌어 내는 매체로 그가 선택한 것이 다름 아닌 영화라는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고 지배적인 예술이 된 영화야말로 권력이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은밀하게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아니 권력의 힘을 넘어서는 외부를 사유하기 위하여 결국 이진경도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 연인>의 조지나처럼 혁명전사가 되어 영화라는 권력의 내부 속으로 잠입했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탈주의 철학자 이진경은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혹시 동맹을, 연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철학이나 영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탈주에 대한 것으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작은 희망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우리의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그러나 이번에는 간절한 소망으로 계속 울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
이진경 지음, (주)새길 펴냄, 1995년 8월
이 책의 지은이 이진경에 대해서는 이전 기사 "근대적 삶으로부터의 탈주"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