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이 되면 나는 아무 데라도 가고 싶다. 날고 싶은 대로 다 날아버린 날개를 달고 이 세상에 오래 살아 본 미래 기억자가 되어 돌아오고 싶다. 이끼 낀 나무 위의 동네에 집 하나 지을 때까지 몇 번이고 돌아오고 싶다.”
대학교 3학년 때, 신대철 시인의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의 뒤표지에서 이 글을 읽고 나는 얼마나 놀랐던가! 미래 기억자라니, 미래 ‘예언자’가 아니라 미래 ‘기억자’라니! 미래를 예언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기억하고 싶다는 시인의 이 소망은 너무 역설적이어서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시들을 꼼꼼히 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에 수록된 많은 시편들은 자연 속에서 불화 없이 평화롭게 교감한 유년시절의 체험을 다루고 있는데, 그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시인이 꿈꾸는 미래가 바로 그러한 유년의 회복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러니 그가 꿈꾸는 미래는 예언의 대상이 아니라 기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첫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밝혀 놓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저 까치집에 날아들어 밀리고 밀린 잠을 자고 싶다. 그리고 인간으로 깨어나 다시 인간에게 <미래의 말>을 걸고 싶다”
<무인도를 위하여> 이후 12년만에 펴낸 신대철 시인의 산문집 <나무 위의 동네>는 그가 그렇게 까치집에서 밀린 잠을 자고 일어나 유년 시절의 공간을 더듬으며 그 공간 속에서 현재 자라나고 있는 눈 맑은 아이들을 들여다보고 쓴 미래 기억록이다.
그가 잠들어 있던 12년이라는 세월은 몹시도 길었지만 다시 깨어나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이 미래의 말들은 몹시 따스하다. 그러나 그 따스함 속에는 아픔이 스며 있다. 예컨대 다음 구절을 보자.
“상수리나무 숲 속에선 아이들이 여전히 상수리를 줍고 있었다. 나를 보자 아이들은 일시에 달려들어 상수리를 털어달라고 조른다. 나무를 보니 오를 엄두가 안 난다. 돌을 몇 번 던져 보았지만 잎새만 떨어지고 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꼬마아이들이 받쳐 주는 힘으로 나무에 오르는 기쁨이란! 그 조그마한 힘에 의해 조금씩 오를 때마다 이상하게도 내 체중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았다. 체중뿐만 아니라 키도 나이도 줄어 나무를 다 올라갔을 때에는 어느새 소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소년처럼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타고 다니며 나무를 마구 흔들어 댔다.…(중략)…
나무를 내려가기 시작하면 나는 다시 조금씩 조금씩 나이를 먹고 키가 자라 땅에 발을 내려놓을 때에는 중년 남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무 위의 소년이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사는 데에 자신이 없는 그런 남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동네 밖을 한 걸음만 벗어나도 낯설어 하고 사람을 겁내고 자신까지도 두려워하는 그런 남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14-15쪽)
나무 위의 동네, 그 주민들은 어린이들뿐이다. 그래서 마흔이 다 된 중년의 사내도 나무 위를 오르면서는 키가 작아지고, 체중도 줄고, 나이도 어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비극은 나이든 어른들에게는 나무 위의 동네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일 터이다. 기억 속에 간직된 유년시절로서의 나무 위의 동네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이제 어른이 된 그의 시선은 아이들의 시선과는 달리 자연 속에 있는 동안에도 항상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시선은 자연을 바라보면서도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과 그 기억이 간직하고 있는 상처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 상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이전과는 달리 단지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애정과 놀라움과 기쁨이 거기에 함께 한다.
“봄이 무르익기 시작하면 갖가지 아픈 기억들이 떠오를 것이다. 아픈 기억들까지 거리를 두고 본다면 그것들은 그것들대로 존재를 갖기 시작하고 빛과 향기를 가질 것이다. 아픔 없이 어떻게 깊은 애정을 지닐 수 있겠는가.”(19쪽)
“좀더 있으면 목련꽃 망울이 터질 것이고 우물 청소하는 집도 보일 것이다. 묻혀 있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살아나올 것이다. 자기 힘으로 살아나지 않는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되살려지고 다시 한번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이 유리크레아 앞에서의 오딧세우스의 흉터 정도로 아물어질 수 있다면 놀랍기도 하고 숨 가쁠 만큼 기쁘기도 하리라.”(92쪽)
12년 동안 까치집에서 밀리고 밀린 잠을 자고 성취한 이러한 성숙이 이제 그의 시선을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로도 돌리게 한다.
그는 동네 아저씨가 짠 평상에서 낯선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에서 그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생생한 감동을 맛본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다가 동네 빈터에 밭을 붙이고 있는 한 사내를 만난다. 자신이 키운 빨간 고추를 가리키며 저것이 시간이 익은 것이라고 말하는 그 사내 앞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또한 수도가 없어서 한겨울 밤 어둠 속에서 우물물을 긷고 있는 윗집에 사는 모녀에게도 처음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고생하는 그들에게 그는 자신의 수돗물을 떠 가라고 제안하지만 그들은 거절한다. 그 모녀가 거절한 것은 4년 동안 이웃해 있으면서도 윗집에 수도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지낼 정도로 무관심했던 그의 사람됨을 거절하는 것임을 그는 아프게 깨닫는다.
자신의 주변에서 만나게 된 이런 이웃들을 통하여 비로소 그는 자신이 ‘동네에 살면서 동네에서 한 여행자로, 관찰자로만 살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따라서 신대철의 산문집 <나무 위의 동네>는 유년의 기억에서 현재의 생활로, 나만의 성찰에서 이웃들에 대한 관심으로, 다시 말해 까치집에서 평상으로의 자리 이동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첫 시집에서 까마득한 높이 위에 지은 까치집이었던 ‘나무 위의 동네’는 이 아름다운 산문집에 이르러서는 이제 사람들의 엉덩이를 받쳐주는 편안한 높이의 평상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 이동은 결코 속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다. 까치집의 동네에서는 오직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유년만이 주민이 되지만 낮아진 평상 위의 동네에서는 지금 이 순간의 자신과 그 주위의 많은 이들이 모두 주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변신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를 구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대철의 산문집 <나무 위의 동네>는 그 공간 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미래 기억록’이며 ‘미래의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나무 위의 동네>
신대철 지음, 청아출판사 펴냄, 2000년 1월
이 기사는 인터넷서점 YES24의 독자리뷰에도 기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