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르케스의 이름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그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1982년이었다. 대다수의 한국 독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낯선 남미의 소설가에게 주어진 노벨 문학상의 후광은 그를 단숨에 이 시대 최고의 소설가로 끌어 올렸으며, 당시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제명으로 출판된 그의 소설은 언론의 집중적인 지원사격을 받으며 교양인의 필독 도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자칭 교양인이라고 하는)이 모두 읽는 그런 책은 나는 읽지 않는다는 묘한 자존심으로 책을 선택하던 당시의 나의 독서 취향은 마르케스의 소설을 나의 관심권 밖으로 밀어내었고 그 후 20년 동안 마르케스는 나의 책꽂이에 올라오지 못했다(용서하시라 마르케스여!). 남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나만의 것을 추구하던 젊은 날의 오만이 빚은 결과였다.
그러나 여러 책을 읽으면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마르케스의 이름은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으며, 동시에 ‘그의 소설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하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갚지 않은 부채처럼 마음 한 구석에 늘 무겁게 자리하고 있던 ‘마르케스의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마침내 나의 최근 도서구입 목록에 <백년의 고독>을 올려놓았고 새해의 며칠 동안을 나는 <백년의 고독> 속에 유폐된 채 보낼 수 있었다.
부엔디아 가문의 6대에 걸친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마꼰도’에서 보낸 나의 짧은 유폐는 예상외로 즐거운 것이었다.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 <집시의 시간>과 <언더그라운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 매혹적인 세계 속에서 이야기들은 마치 실타래에서 실이 풀려나오듯 솔솔 흘러나왔다.
‘마꼰도’라는 미궁에 유폐된 나는 한 손에는 솔솔 풀려나오는 그 이야기들의 실을 잡고, 또다른 한 손에는 부엔디아 집안의 가계도(이 소설을 읽으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가계도이다. 이 가계도 없이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가족관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수 십 번 책을 뒤적거려야만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권두에 이 가계도를 실은 출판사 또는 역자의 배려는 지극히 적절한 것이다)를 쥐고서 천천히 길을 더듬어 그 곳을 빠져나왔다.
자, 그렇다면 이제 내가 ‘마꼰도’라는 미궁에서 목격한 미노타우로스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목격한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은 머리는 황소이고 몸뚱이는 사람인 반인반우(半人半牛)의 괴물이 아니라 열 명의 다른 얼굴들처럼 보이는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사람이었다.
서로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아주 대조적인 그 두 개의 얼굴은 하나는 ‘아르까디오’이고 또다른 하나는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그 얼굴이 열 명의 다른 얼굴들처럼 보이는 이유는 ‘마꼰도’라는 미궁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 5명의 ‘아르까디오’와 5명의 ‘아우렐리아노’가 그 얼굴 속에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 얼굴 모습이 ‘아르까디오’의 얼굴로 나타날 때는 모험을 즐기는 사나이처럼 활력에 넘치고 강인해 보였으나 ‘아우렐리아노’의 얼굴로 나타날 때는 고독 속에 은둔하는 현자처럼 조용하고 명민한 표정을 지었다.
마르케스는 이러한 두 가지 대조적인 표정을 통하여, 16세기 유럽의 총칼 앞에서 그 순수성을 유린당한 이후 아직껏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분열된 자의식을 그려보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백년의 고독>에서 펼치는 이야기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현실에 젖줄을 대고 있는 ‘살아 있는 이야기’인 셈이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인물을 모델로 삼은 존재라는 점, 콜럼비아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보수파와 자유파간의 ‘천일 전쟁’을 기둥 줄거리의 하나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바나나 농장의 파업과 시위 현장에서 일어난 학살도 실제로 있었던 일(물론 학살된 노동자의 수는 이 소설에서 상당히 과장되어 있지만)이라는 점 등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문제적 성격은 단순한 리얼리즘이 아닌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 환상과 현실은 경계가 없이 공존하며 어느 부분에서는 환상이 현실을 압도한다. 마르케스가 현실세계(리얼리즘)에 도입한 환상(마술)은 메마르고 보잘 것 없는 현실세계를 풍부하게 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의 숨은 의미와 진실을 우리 앞에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 테세우스가 미궁을 빠져나오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이 아리아드네 공주가 준 실타래였던 것처럼, ‘마꼰도’라는 미궁에서 벌어지는 이 복잡하고 뒤얽힌 이야기들에 정작 출구를 마련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여성 인물들이다.
이 소설에서 남성 인물들은 매우 단순하고 유형화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반해, 여성 인물들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다. 남성 인물들의 이름(‘아르까디오’와 ‘아우렐리아노’)보다 훨씬 다양하게 나타나는 여성 인물들의 이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안과 밖에서 각각 중심 기둥 역할을 하는 우르술라와 삘라르 떼르네라를 비롯해서, 숙명적인 연적이었지만 결국은 남자 없이 삶을 마감하는 비운의 과부와 처녀라는 점에서는 닮음꼴인 레베까와 아마란따, 평생 고독과 침묵 속에서 모든 일을 감내한 시어머니 산따 소피아 델 라 삐에닷과 평생 허영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위선의 삶을 살아간 며느리 페르난다.
시누이의 질투의 희생양이 되어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 레메디오스와 어머니의 허영심의 희생양이 되어 수녀원과 음침한 병원에서 삶을 마감하는 메메, 지상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타고난 미모와 백치와도 같은 천진함으로 결국 천사가 되어버리는 미녀 레메디오스와 자연까지도 흥분시킬 수 있는 천부적인 섹스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뻬뜨라 꼬떼스.
그리고 활동적이고 도발적인 성격의 미인이나 그로 인해 조카와 근친상간에 이르고 결국 부엔디아 가문의 종말을 뜻하는 돼지꼬리가 달린 아들을 낳다가 죽고마는 아마란따 우르술라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자기 이름과 독특한 개성들을 가지고 있는 여성 인물들이야말로 이 소설에 생명력을 가득 불어 넣어주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환상 또는 현실세계에 갇혀있는 남자들의 닫힌 세계에 출구를 마련해 준다.
그리하여 나는 이 여성인물들이 준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마꼰도’라는 미궁을 빠져나오는 것이 테세우스가 아니라 바로 미궁에 갇혀있던 미노타우로스(즉 라틴 아메리카) 자신임을 목격하게 된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그가 걸어나오는 순간 ‘마꼰도’는 폐허로 변하고 말지만 나는 이것이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창세기의 시작이라고 믿고 싶다. 그것은 멜키아데스의 양피지에 쓰인 것처럼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반복되지 않는’새로운 역사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백년의 고독 (Cien años de soledad)>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지음, 조구호 옮김, 민음사 펴냄, 2000년 11월
이 기사는 인터넷서점 YES24의 독자리뷰에도 기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