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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 전인 1984년의 일이다.
나는 그 해 가을 내 첫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신화 잠들다>라는 이름의 장편소설이다. 그 소설은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가 <한국일보>의 '84년 문학 결산'에서 그 해 한국문단의 의미 있는 수확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나는 그 소설의 초고를 1967년에 썼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 때였다. 나는 200자 원고지 1080매의 소설을 40일 동안에 썼다. 그리고 당시 유일한 문예지였던 <현대문학>의 제1회 장편소설 공모에 응모했다. 그때의 소설 제목은 <개 임금님>이었다.
결과는 낙선. 최종심에서도 한 단계 위인 '당선후보'에까지 올랐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내 생애 최초로 마신 '낙선의 고배'였다. 당선후보에 오른 탓에 <현대문학사>로부터 생애 최초의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청탁 내용은 '낙선 유감'을 쓰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참 용렬했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서, 또 서라벌예술대학으로 가서 문창과 과장교수인 김동리 선생을 뵈었더라면 무시험 입학에 전학년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서라벌예대 출신 작가들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기도 했다.
도저히 대학에 갈 수 없는 가정형편만을 생각했다. 고학으로 대학을 다닐 만큼의 배짱이나 실력도 없었다. 대학에 가지 못하는 대신 혼자 열심히 소설 공부를 해서 소설가로 대성하자는 비현실적인 꿈만 잔뜩 꾸며 살았다.
그때로부터 15년만인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으로 마침내 등단의 꿈을 이루었다. 그 15년의 세월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여러 해 동안 신춘문예 최종심 단골이었다. 몇 년 동안은 객지 유랑 생활도 했다. 서울 변두리의 건축공사장, 마산화력발전소, 바닷가 간척공사장 등을 전전하며 별난 일도 참 많이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을 때 나는 맨 먼저 장편소설 <개 임금님>을 생각했다. 나로 하여금 스스로 가능성을 믿게 하고 소설가를 꿈꾸게 만든 작품이었다. 그 소설을 내 원고 궤짝 속에서 맨 먼저 '방출'해 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15년만에 개작을 해서 1300매의 소설로 만들었다.
그리고 선배 소설가 박범신씨의 소개로 한 출판사를 알게 되어 1984년 소설 제목을 <신화 잠들다>로 바꾸어서 단행본으로 출간, 내 최초의 책을 보게 되었다.
그 해 11월 24일 고장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고장의 <흙빛문학회>에 몸담고 있는 덕이었다. 우리 고장에서는 최초로 열린 출판기념회라는 이름의 행사에 고장의 많은 이들이 참석하여 축하를 해주었다. 나는 행사를 치르고 남은 수익금 40만원으로 <흙빛문학> 창간호와 2집을 만드느라고 '새마을금고'에서 얻은 부채 40만원을 (금액의 일치가 참 공교롭다고 생각하며) 깨끗이 청산할 수 있었다.
그 출판기념회의 참석자 중에는 후에 국회의원이 되는 장기욱씨가 있었다. 오래 검사 생활을 한 다음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는, 서산 출신 최초 법조인이었다. 그는 이듬해 2월 12일 실시되는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뜻을 갖고 있었다.
문학평론가 이래수 동국대 교수(1990년 작고)가 내려와서 내 소설 <신화 잠들다>에 대한 '해설' 강연을 해주었다.
소설은 좀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신으로부터 받은 영묘함을 지닌 개가 인간 나라 왕의 왕자가 되고 왕위를 계승할 뿐만 아니라 인간 여자와 결혼까지 하는 이야기였다.
개를 왕의 후사로 삼는 과정, 왕좌에 앉히는 과정, 그리고 인간 여자가 개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는 과정 속에서는 인간들의 권력욕에 의한 온갖 암투와 치열한 논리 싸움이 전개된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명분과 논리를 무제한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래수 교수가 설파한 '작품 해설'의 한 대목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페우스 왕은 악법을 만들어 공화제와 민주제를 요구하는 백성들을 억압하고 탄압합니다. 우선,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수염을 기르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백성들의 몰개성과 획일성을 조장하기 위한 기도라고 여겨집니다. 또 언어통제법을 만들어, 개를 임금으로 삼는 것에 대한 어떠한 찬·반 토론도 못하게 합니다. 기타 집회 시위의 금지, 의식 있는 학자와 웅변가들과 시인들을 변절시키는 일 등을 감행하여 사회를 극도로 경직화시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아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인데, 그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닌데 하고 느꼈다면, 그 사람은 이 소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그 의도를 대충은 파악한 셈이 됩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때가 때이니 만큼 더 부연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래수 교수의 작품 해설을 장기욱씨는 유심히 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 후에 그 소설을 독파한 모양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소설책 2천권을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무척 고마우면서도 내가 중간에서 무슨 역할을 하면 작가로서 모양이 좋지 않으니 출판사와 직접 교섭을 하시라고 했다.
해가 바뀐 1월 어느 날 출판사 사장이 직접 트럭에다가 책 2천권을 싣고 왔다. 당시 그 책은 2800원의 정가가 매겨져 있었는데, 2천원씩 따져서 2천권의 책값은 400만원이라고 했다. 200만원은 현금으로, 200만원은 3개월 어음으로 받았다고 했다.
천주교 신자인 장기욱씨는 그 책을 서산과 태안의 천주교 신자 가정에만 개별 우송을 했다. 서산과 태안의 천주교 신자 2천 가정에 내 책이 배포된 것이었다.
나는 장기욱씨가 고마웠다. 지역에서 사는 한 신인 작가의 소설책을 2천권이나 사서 천주교 신자 가정들에 우송을 해준 사실은 분명 특이한 일이었다. 비록 선거 운동 차원으로 한 일이긴 하지만, 거기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 책을 받은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장기욱씨로부터 책 선물을 받은 천주교 신자 가정들이 그 책을 얼마나 읽고 또 어떻게 취급할지 궁금한 마음도 컸다. 신앙 관련 책도 아니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에세이 책도 아니었다. 풍자와 해학 기법으로 쓰여진 소설이고, '유추' 능력을 동원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조금은 어려운 그 소설을, 자신이 손수 서점에 가서 돈을 내고 구입한 것도 아닌 그 책을 2천여 가정이 어떻게 다룰지, 괜히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가끔 책을 읽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방학 때 집에 왔다가 책을 읽었다는 한 대학생에게서 질의 전화를 받은 일도 있었다. 재작년인가, 서산시 부석면 송시리의 한 신자 가정에 갔을 때는 그 집 책꽂이에 꽂혀 있는 내 책을 보고 반가워한 일도 있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선거 때 무슨 국물을 얻어먹은 일은 없다. 지방선거 때 단 한번 군수 출마자로부터 향토문학지의 발간 협조금 기십만원을 받은 적은 있다. 돈을 받은 시기가 매우 적절치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도 그 일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20년 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분이 내 책을 2천권이나 사서 지역에 배포한 일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의문이 전혀 없지는 않다. 말썽의 소지를 우려하여 천주교 신자 가정에만 배포를 했고, 당시에는 그게 선거법 위반 사항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거의 잊고 지냈던 20년 전의 일을 오늘 다시 떠올리고 기록을 하는 것이 다소 면구스럽기는 하다. 그렇지만 부끄러운 일은 아니리라고 생각한다. 선량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지역에서 사는 작가의 책을 2천권이나 사서 지역에 배포한 일은, 그 발상은 아무래도 특이한 유형이고, 그만큼 신선함 같은 것도 지닐 수 있다고 여기고 싶다.
만일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20년 전의 장기욱씨처럼 평론가의 작품해설을 귀담아 듣고 또 자신이 몸소 책을 읽고 작품의 내용을 소화한 경우라면 작가 쪽에서 굳이 거부하거나 사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학을 이해하는 사람, 선량을 꿈꾸는 재력 있는 이가 지역 문인들의 시집이나 수필집, 소설집을 출간해주고 그 책을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한다면, 그리고 그게 시기적으로 선거법에만 저촉되지 않는다면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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