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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의 '사법'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는 '전시(戰時)'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기반한 군 사법제도 때문으로 평시에 '軍 비리'를 은폐하는 데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오마이뉴스>는 [특별기획-군 사법을 고발한다]를 통해 현행 군 사법체제의 불합리 실태를 고발하고 대안도 제시할 방침이다... 편집자 주

▲ 지난 99년 1월25일 제2군단 보통군사법원은 정00 중사에 대해 군용물 절도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진은 '지휘관 확인' 내용이다.

[제1 사례 : 35사단 신병대 M16 소총 2정 도난사건]

지난 2001년 7월 전북 전주에 위치한 35사단 신병교육대 무기고에서 M16 소총 2정이 사라졌다. 방아쇠 울을 끼워 연결한 쇠사슬 잠금장치를 자르고 누군가가 탈취해간 것이다.

헌병은 곧바로 신병교육대 간부와 병사 전원을 강당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설문조사 용지를 돌렸다. 설문조사지에는 '한달전부터의 (자신의) 행적' '총기를 가져갔다고 의심할만한 사람의 이름' 등을 기입하라고 적혀 있었다. 헌병들은 강당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헌병은 결국 4명의 유력 용의자를 추려냈다. 그 뒤 합조단에서 거짓말탐지기 조사관이 내려왔다. 심리학과 출신의 한 헌병은 용의자들에게 최면을 걸어 "무기고가 보이느냐" "당신이 무기고 속으로 들어간다" 등의 주문을 외며 총기 탈취 당시의 상황의 재구성을 시도하기도 했고, 일부 수사관은 점을 치기 위해 '철학관'으로 향했다.

특수훈련을 받은 헌병대 특별경호팀 4명은 항상 용의자 심문 과정에 배석했다. 이들은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중의 한 명인 황00 상사의 자백을 듣기 위해 밤잠을 재우지 않고, 발가벗긴 뒤 방망이로 성기를 때리는가하면, 연못 속에 집어넣고 "불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들은 또 1회용 주사기를 황 상사의 팔에 갖다대면서 "이 주사기에는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약이 들어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총기분실 사건 수사에 동원된 '설문조사' '점집' '최면술'

헌병은 황 상사에 대한 영장을 청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육군참모총장에게까지 "범인을 잡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당시 35사단 최00 법무참모는 헌병의 영장 청구를 기각하고, 구속기간이 만료됐다는 이유를 들어 1달여 동안 구속된 황 상사를 풀어주었다. 법무참모는 대신 특별경호팀 4명을 잡아들여 황 상사 고문 사실에 대한 진술을 확보했다.

육군본부 검찰부도 나섰다. 당시 권00 검찰관은 수사과정에서 고문한 헌병 조00 상사를 구속기소하기 위해 결재를 올렸다. 고문에 사용됐던 주사기를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내는 등 물증과 고문자들의 자백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인 황 상사는 가해자인 조 상사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권 검찰관의 구속의지는 어느 정도 확고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윗선에서 조 상사의 구속 기소 서류에 사인을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헌병대는 조 상사를 진급대상자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헌병은 왜 고문까지해가면서 황 상사를 '범인'으로 몰아갔을까. 그 배경에는 1) 이 사건이 터지기 3개월전에 '영천 탄약창 경계병 총기 피탈사건'으로 군기강이 해이해졌다는 여론의 질타가 쏟아졌고, 2) 8월말 인사철과 겹치면서 군 장성들이 자신의 진급인사를 의식해 사건을 서둘러 종결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실제 헌병측의 한 인사는 당시 35사단 법무참모에게 장성들의 인사 문제를 언급하며 이 사건을 기소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 7사단 헌병대가 지난 98년 9월1일, 16일 올린 '속보보고'.


[제2 사례 : 2군단 K-2 소총 1정 분실사건]

지난 99년 2군단에서 일어난 총기 분실사건도 헌병의 초동수사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 해 1월25일, 제2군단 보통군사법원은 정 아무개(당시 23세) 중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에게 적용된 죄명은 '군용물특수절도'. K-2 소총 1정을 절취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혐의 등으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은 정 중사는 3년여가 지난 2002년 7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사실상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됐다.

정 중사는 1심 재판정에서 "전역 후 강도에 사용하기 위해 소총을 훔쳤다"고 진술했고, 총기를 숨겨놓은 장소를 밝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나서는 이같은 진술을 번복했다. 그는 왜 1심 군사법정에 서서까지 이같은 진술을 해야만했을까.

지난 98년 9월1일 제7사단 헌병대의 '중요사건보고'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속보가 올라왔다.

"내무실 총기대에 보관중이던 K-2 소총 1정이 원인불상으로 분실됨."

이어 이 문서에서는 조치사항으로 "수사본부 편성 조사중" "소속대 병력 20/530명 정밀 수색중"이라고 밝힌 뒤 분실된 총기를 찾기 위해 총력전을 펴는 한편 연대장까지 보고된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이 문서에는 또 총기를 절취해 은닉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11명의 중대원과 민간인 출입자 등을 용의자로 선정해 수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이 용의자 리스트에는 정 중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무기징역형 받은 '총기 절취범' 무죄 판결

하지만 9월16일, 7사단 헌병대는 정 중사 등이 범인이라는 진술 등을 확보했다며 '중요사건보고'에 다음과 같은 제목을 적었다.

"중사 2명이 9월30일 만기 전역 후 강도를 하기 위해 상호 공모하여 총기절취 기회를 노리다가, 후배 하사를 시켜 내무반 총기대에 거취된 K-2 소총 1정을 훔쳐내 은닉함 [총기 미회수]"

헌병은 유아무개 이병이 "총기 도난 당시 '후배 하사'를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뒤 "정 중사 등 2명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결국 3명이 공모해 총기를 훔쳤다는 것이다.

이날 헌병대 '주요사건보고'에는 "수사중 구타나 가혹행위 없이 범행자백을 하였다고 진술했다"고 적시되어 있다.

'오토바이타는 자세 취하기' '따귀 때리기' '전투화발로 얼굴 가격'

하지만 이 사건을 담당했던 황00 준위 등 헌병 수사관계자들은 정 중사와 공모해 총기를 절취했다는 혐의로 실형을 살았던 이00 하사로부터 되레 '직권남용 감금' '독직 폭행' 등의 혐의로 고발당했다.

▲ 지난 99년 육군본부 검찰부는 이00 하사가 헌병 수사관계자들을 독직폭행으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판결을 했다. 하지만 검찰부는 '사실과 이유'에서 헌병이 총기 분실 수사과정에서 자행한 고문 등에 대해 사실로 확인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육군본부 검찰부는 헌병 수사관계자들을 불기소(기소유예) 처리하면서 '사실과 이유'에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피의자 황00 등 6명은 공모해 구속영장 없이 군사법경찰관으로서의 직권을 남용해 불법감금하고, …정00 중사에게 오토바이타는 자세 취하기, 깍지끼고 엎드려 뻗쳐 등 가혹행위를 가하고, …수사과장실에서 최00의 다리 사이에 경봉 2개를 끼워놓고, 정 중사의 따귀를 7, 8회 때리고, …최00의 가슴을 주먹으로 3, 4회, 뺨을 2, 3회, 배를 2, 3회, 목젖 부위를 1회 때리고, …전투화발로 정 중사의 얼굴을 3, 4회, 슬리퍼로 정 중사의 얼굴을 3, 4회 때려 폭행을 가한 것이다."

정 중사 등이 헌병 수사 과정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육군 검찰부는 "피의자들이 초범이고, 피의자들의 행위는 사적인 감정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헌병 수사관으로서 지휘관의 지휘 의도를 받들어 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총기를 찾기 위한 임무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면서 기소유예를 결정했다.

하지만 지난 2002년 7월24일 서울고등법원은 정 중사의 총기절도 혐의에 대해 "이들의 자백은 불법으로 체포·구금된 상태에서 가혹행위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헌병이 첫 단추를 잘못꿰고, 군검찰이 이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뒤 '무기징역'이라는 황당한 판결로 이어지는 군사법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의 인권은 철저히 유린됐다. 물론 두 사건에서 분실된 총기 3정도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총기 절취 용의자로 몰렸던 정 중사는 아직도 고문의 후휴증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35사단의 황 상사는 혐의없음으로 불기소 처리된 후 6개월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전역했다.

[제3 사례 : 55사단 군의관 '13일간 구금사건']

55사단에서는 최근 황당한 일로 박00 군의관(중위)이 헌병에 의해 13일간 구금됐다가 풀려난 사건이 발생했다. 사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6월20일, 일요일 당직 근무였던 그는 출근하기 위해 경기도 용인 시내 강변 주차장에 갔다가 자신의 차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전날 내린 폭우로 강물 범람을 우려해 용인시청에서 모든 차량을 견인해간 것이다.

그는 의무병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늦는다"고 말한 뒤 차량을 찾아 오전 10시경 부대에 도착했다.

그는 오후 6시30분경 당번병이 군의관의 저녁식사를 잊고 가져오지 않자, 일직 사령에게는 보고하지 않은 채 사단 앞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는 50여분이 지난 7시20분경 부대로 되돌아오면서 위병소를 통과할 때 위병이 신분을 거듭 확인하자 짜증을 내며 "야 00놈아, 나 중위 000이야"라고 말하고 들어왔다.

초병에게 욕을 한 사실이 참모장의 귀에 들어간 뒤 헌병 관계자는 사단장에게 "구속하겠다"고 보고했고, 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영창에 집어넣으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중위의 범죄 혐의 내용은 '무단이탈 2회' '초병 모욕'. 헌병은 박 중위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기각당했다. 박 중위 역시 이 사건에 대한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위의 세 가지 사례는 군 관련 사건의 수사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요약하면,

1) 초동수사를 전담하는 헌병의 수사가 체계적이고 합법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수사과정에서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2) 헌병이 사건 초기에 사단장급 이상 부대장(지휘관)에게 지휘보고(속보 보고)하는데 이 때 사건의 처리 방향 및 구속 여부 등 관련자들의 처벌 수위가 결정되고, 군 검찰과 군 판사는 사실상 이를 승인해주는 '통법부' 역할만 하고 있다는 점,
3) 민간에서와는 달리 군의 경우 헌병이 교도소와 구치소, 영창을 관할하면서 지휘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피의자의 인신을 구속하고, 이는 재판의 독립성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 등이다.

군 검찰권을 압도하는 '헌병 권력'?

▲ 국방부 정문에서 근무중인 헌병들.
ⓒ 연합뉴스 백승렬
가령 총기분실 사고에 대한 헌병의 수사에는 민간 검찰로서는 거의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설문조사' '점집' '최면' 등의 비과학적인 방법까지 동원됐으며, 초동 수사단계에서 헌병의 속보보고에 꿰맞추기 위해 고문 등 인권 유린이 자행된 것이다.

군 검찰은 법 체계상 헌병을 포괄적으로 지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이는 '선언적 규정'에 그치고 있다. 즉, 지휘관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비대화된 '헌병 권력'이 사실상 군 사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35사단 총기절취사건의 용의자였던 황 아무개 상사는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헌병들은 '군을 위해 상사 한 명 희생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문이 계속되면서 나는 그 말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여년의 군생활을 이렇게 마감하는구나라고 생각하니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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